장년기
내비 오픈 후 있었던 여러 급한 문제들을 해결한 후 내비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TF는 정식 팀이 되었고, 나는 그 팀에서 계속 일을 하는 대신 기존에 하던 택시 업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약 9개월 간은 기존 서비스를 유지 보수하는 일만 담당했다. 내가 맡은 것은 택시의 배차와 기사용 서비스, 이렇게 2개.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크게 3개로 나눠서 진행했다.
1) 꼭 해야 하는 일: 주로 위에서 요구하는 핵심 기능
2) 당장 지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 실험
3) 그 외 각 구성원이 하고 싶은 것들
1번은 무조건 우선순위가 첫째일 수밖에 없다. 윗선에서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괜찮은가에 대해서는 사전에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일단 결정되고 나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게 바로 회사원의 도리. 나머지 2번과 3번이야말로 유지보수의 핵심이었다. 기왕이면 재미있게 일하면서, 기왕이면 지표로 드러나는 성과도 내고, 기왕이면 각자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었으면 했다.
먼저 개선사항 리스트를 만들었다. 어떤 것인지는 당연하고 거기에 더해 누가 제안했고 반영이 됐는지까지 적고, 그걸 모두가 보는 곳에 상시 공개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제안한 사람이 주도해서 할 수 있도록 했다. 반영이 어려우면 왜 어려운지 명확하게 적고 나서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그러면서 우선순위 1번 항목을 중간에 적절히 끼워 넣었다. 우선순위는 1번이 앞서지만 실제 계획은 2번과 3번에 맞춰서 정하고 그곳에 1번을 끼워 넣었다.
이후 하나씩 꾸준히 실천을 해나갔다. 그 과정은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생각과 다른 게 나오고, 지표에 부정적 영향이 생기면 롤백을 해서 원상복구 하기도 해야 했다. 한 번에 여러 개를 할 수도 없다. 그러면 대체 어떤 것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없으니까. 선별해서 조금씩 실행하고, 결과 보고, 함께 논의하고, 이후 계획 짜고. 이 과정이 천천히 반복됐다. 그렇지만 확실히 보람은 있었다. 일단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상황이라 당장의 성과에 대한 부담 없이 안정적인 마음으로 실행하고 논의할 수 있었고, 리스트에서 하나씩 사라지는 걸 보는 보람도 컸다. 내가 한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게 되면 당연히 더 개선하고 싶고 다른 걸 더 찾아서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중엔 결국 개선사항 리스트 내의 모든 항목을 마무리했고(반영하든, 아니면 반영하지 않든) 함께 했던 모두가 뿌듯해했다. 근 몇 년 간 가장 평온하며 소소한 보람도 '꾸준히' 느꼈던 매우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일도 있고 익숙한 일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선호한다. 실제로 부서 이동이 가능할 때면 뭔가 핫해 보이고 새로운 걸 하는 부서로 더 많이 지원이 몰린다. 확실히 신규 서비스는 더 대단해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일이 정말 그렇게 매력적이고 좋은 일인가? 익숙한 것을 잘 운영하는 일은 정말 지루하고 덜 도전적인 일인가? 이것저것 다 경험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을 더 잘하는가는 사람의 성향 차이도 크다. 혼란스럽고 정해진 것도 없고 리스크도 큰 새로운 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차분하게 정해진 것들을 조금씩 잘해나가는 익숙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 각자의 성향에 맞는 일을 잘 분배하고, 어떤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두 다 중요하고 잘해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중국의 한나라가 세워지고 공신 서열을 정했을 때 1등이 싸움터에 나가서 용맹하게 싸우고 수많은 전략을 세우고 각종 모략을 펼친 사람들이 아니라, 뒤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하고 내정을 완벽하게 해냈던 '소하'였다는 사실은 참 의미심장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단 일은 잘해야 하고, 공격보다 방어가 더 어려운 법이다.
물론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최고다. 새로운 것이든, 익숙한 것이든. 그런 욕심이라면 얼마든지 더 부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