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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pr 29. 2020

어른들이 나에게 존댓말을 쓴다

다섯 번째 기록

기록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불리는 것에 많이 예민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칭 말이다.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 두 자를 읊어주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반대로 무덤덤히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면 나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 화자가 엄마라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름 석 자 말고도 '얘'나 '쟤'와 같은 지칭은 나를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그렇게 불릴 때마다 기분이 팍- 상해버리기도 했다. 주변 어른들이 내가 교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까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싫어하는 호칭을 쓰실 때마다 다짐했던 것 같다. 빨리 어른이 되자고. 내가 어른이 되면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더 존중을 표해야지, 이런 생각을 주로 했었다. 세월도 참 빠르지. 그게 벌써 5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갓 입학한 대학에 조금씩 적응해나갈 즈음이었다. 수업에 궁금한 점이 생겨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러 갔었는데, 교수님이 나에게 존댓말을 쓰셨다. 짧은 질문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온 후에도 기분이 들떴다.


지금 내가 어른한테 존댓말을 들은 건가?


 이러한 의아함과 함께, 사실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말캉말캉했다. 나의 바람이었던 '어른으로부터 존댓말 듣기'가 이리 허무하게 이루어져서 그랬을까.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아 한껏 들뜨는 마음을 내려앉힐 수도, 내려앉히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교수님은 이름 끝에 '학생'이라는 호칭을 덧붙여 주셨는데, 들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내리 같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대학생이 되니 내 이름 뒤에 붙는 학생이라는 호칭도 마냥 새로울 뿐이었다. 물론 학생들에게 친근하게 반말을 쓰시는 교수님들도 계셨다. 하지만 청소년 때 들었던 그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중의 선을 지키고 있으신 듯했고, 나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렇듯 내 20대가 고스란히 담길 대학의 분위기는 나로 하게끔 이제 호칭 따위로 머리가 어지러워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막상 존중을 받는 어른의 위치에 있다 보니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존중의 무게였다. 20대에 들어선 나를 존댓말과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불러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만 찼다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지는 않는 법이니까. 긴 고민 끝에 내가 찾은 답은 책임감이었다.


 성인이 되자 내 손에 쥐어지는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음주와 흡연부터 운전, 각종 수입활동 등 수많은 곳의 포탈이 활짝 열린 느낌이랄까. 앞서 언급한 것들을 여태껏 권리로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면이 보인다. 권리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 어린이 세트 시켜 먹어도 배불렀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이제 어엿한 1인분이 되어버렸다.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거듭난 것이다.


 책임감은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들에게 지어진 책임의 무게는 막중하다. 가장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가끔 부모님을 볼 때마다 등에 짊어지신 책임이 점차 나에게 뚜렷해져 보임을 느낀다.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나눠 들기 위해 난 공부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책임과 비교한다면 깃털보다 가벼울 테지만, 어찌 되었건 나에게도 책임감이 생겨버린 것이다.


 어른들은 그걸 알아보는 것 같다. 완전한 존재로서의 타인을 말이다. 어깨에 짊어진 책임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지만 엇비슷한 무게의 그것을 짊어졌거나 짊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아보기 마련이다. 그런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존댓말을 쓰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너무 깊어진 것 같은데. 가벼운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자면, 요즘 나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참고로 이 글은 1월 중순에 쓰였다. 지금은 바이러스로 인해 장기간 휴무 중이다...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척척 해나가는 친구가 있는 반면 느긋한 성격 탓에 일을 제시간에 끝마치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정말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을 참 많이 만난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마다 '저 아이들도 내가 저만했을 때 했던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면 어렸을 때의 내가 생각나고는 한다.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나쁘겠지, 하며 성을 뗀 이름 두 자를 불러줄 때가 많다. 아이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얘'나 '야'보다는 '친구야' 하며 다가가려고 한다. 어렸을 때의 내가 한 다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다. 나름 나도 책임감 있는 어른이잖나.


 아무리 생각해도 존중은 어른들끼리만 나눠 가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떤 위치에 있든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서로의 입장에 서서 존중을 보일 때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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