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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Sep 16. 2020

"야, 시끄러워!"에 대한 고찰

열두 번째 기록

야, 시끄러워!


    며칠 전 저녁, 거실에 있던 아빠가 방에서 유튜브를 보던 오빠에게 신경질과 함께 던지신 한 마디다. 그럴 필요까진 없지만 굳이 잘잘못을 따져 본다면야 오빠 소리가 크긴 했다. 거실 건너편의 내 방에서도 오빠가 무슨 영상을 보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했으니. 아빠도 그 소리가 당연히 거슬리셨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 무죄!'도 아니다. 아빠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냐고? 아빠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을 위반하셨다.



    요새 들어 누군가의 말투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잦아졌다. 하기야, 평생을 같이 지내온 아빠의 말투도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누구의 말투인들 마음에 들랴. 내 미간에 주름을 잡게 하는 말투를 일일이 따져볼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인 공통점이 하나 있다. 청자를 배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았던 아빠의 말투가 꼭 그렇다. "야, 시끄러워!"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야", "시끄러워", 그리고 "!". 지금부터 이 세 문제점들을 철저히 내 개인적 주관에 따라 분석해 볼 것이다.


"야"

    사실 이 호칭이 나온 것만으로도 말 다했다고 본다. 절친한 사이에 가볍게 부르는 호칭이라면 예외의 경우겠지만. 아빠는 짜증 섞인 "야" 말고도 다른 호칭으로 오빠를 부를 수 있었다. "아들"이라든지, 오빠의 이름이라든지, 아니면 오빠의 별명을 부른다든지 말이다.

    나는 이 호칭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가족들 사이에서는 지양되어야 하는 호칭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 견해에는 가족 내 나이순 꼴등의 서러움이 들어가 있음을 밝힌다.) 사람들에게는 각자마다 이름이 있고 지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야"라고 부르는 건 이를 존중하지 않는 말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름 모르는 아이들을 부를 때 "야" 대신 "친구야"를 애용하는 편이다. "야" 앞에 "친구"만 붙였는데도 훨씬 부드러워 보이지 않나. 이게 호칭의 마법이다.


"시끄러워"

    우리는 굳이 시끄럽다는 말을 쓰지 않고도 오빠가 소리를 줄이게 할 수 있다. "소리 좀 낮춰 줄래?" 너무 교과서 말투인가. 그렇다면 "핸드폰 소리 좀 낮춰 줘"로 수정하겠다. "시끄러워"와 "핸드폰 소리 좀 낮춰 줘" 중에 기분 상하지 않고 기꺼이 소리를 줄여줄 수 있는 말을 고른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는가. 난 후자라고 본다.

    누군가에게 행동을 요하는 말을 해야 할 때 내 감정을 우선시하는 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하길 원하는 건지 단번에 알 수 없어 비효율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시끄러워"라고 말했을 때. 소리를 낮추라는 건지, 문을 닫으라는 건지, 아니면 영상을 끄라는 건지 정확한 발화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차라리 감정을 걷어내고 상대에게 원하는 행동만을 얘기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

    느낌표다. 무려 느낌표. 이는 강한 느낌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문장 부호다. 그래서인지 "!" 다르고 "!!" 다르고 "!!!!!" 다르다. 때에 따라 느낌표는 감탄문, 명령문, 평서문 등에 쓰인다. 여기에서는 "야, 시끄러워"라는 평서문에 쓰였으므로 나머지는 제외하겠다.

    위에서 말한 "핸드폰 소리 좀 낮춰 줘"에는 느낌표가 들어가면 조금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시끄러워"에는 느낌표가 없으면 오히려 어색해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부호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부호는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는지 신경을 쓰는 게 어렵다면 부호를 먼저 정해 놓고 어울리는 말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부호를 물음표로 정해 놓는다면 "핸드폰 소리 좀 낮춰 줄래?" 마침표로 정해 놓는다면 "핸드폰 소리가 좀 크네." 굳이 느낌표 써서 큰 소리 내지 않고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하다.




    속으로만 느끼던 불편함을 이렇게 적어 내고 나니까 세상에 이런 프로 불편러가 있나 싶다. 사람들이 별 뜻 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마다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사실 상대방 기분 다 존중해 가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은 일일 뿐더러,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꼭 곱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일방적인 존중을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허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리 신경 써서 부드럽게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날 선 대답뿐이니. 가련한 짝사랑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아차차.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자는 거다. 말 한마디에도 사랑을 얹고 배려를 담으면 서로서로 기분 좋지 않나. 사랑 조금 얹는다고 해서 배송비 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더러울지라도 사람끼리는 꽃동산을 이뤄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가치관이다. 너무 이상적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가벼운 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마스크 써야 해서 답답한 마당에 못난 대화 대신 고운 대화 한번 나누면 기분도 한결 산뜻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닮고 싶은 차홍 디자이너의 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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