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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Sep 02. 2020

착한 사람 말고 잘하는 사람 될래요

열한 번째 기록

유리: 죄송해요. 저 때문에 차장님 퇴근도 늦어지시고...
정선: 유리 씨가 전에 그랬죠. 자격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냐고. 맞아요. 우리 팀에 발령받는 직원은 해외 컨택 업무가 많아서 기본적인 영어 의사소통은 가능한 사람이 와요. 유리 씨가 여기 들어온 건, 그러니까 특혜죠. 유리 씨보다 6개월 일찍 들어온 상우 씨도 아직까지는 서버 업무만 해요. 들어온 지 몇 달 안 된 신입사원한테 이런 큰 업무를 맡기진 않죠. 역시 특혜예요. 유리 씨가 부사장님 딸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던 특혜. 그게 유리 씨 자격인 거죠.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할 필요 없어요. 유리 씨는 그 자격으로 여기 앉아 있는 거니까. 착한 사람까지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런 것 그만하죠. 더 불편해서요.




 작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VIP'의 한 장면이다. 방영 당시 VIP 전담 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매력을 느껴서 보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전개될수록 드라마 주제가 불륜으로 새는 바람에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고 시청자로서 중도 하차했던 기억이 있다. 요 며칠 끈질긴 유튜브의 추천 끝에 클립 동영상 몇 개를 보게 되면서 '온유리'라는 인물에 대해 차마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얕은 분석을 해봤다.


 유명 백화점 부사장의 자제라는 이유만으로 VIP 전담 팀에 취직했으나 업무 능력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함. 영어로 기본적인 비즈니스 메일조차 보내지 못하고, 고객 자료 조사를 시켰더니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은 다 뽑아 봤다며 정리 및 요약이 일체 되지 않은 종이 뭉터기를 상사에게 들이밂. 팀에 폐를 끼치는 걸 자신도 아는지 항상 불쌍한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삶.


 이 정도만 분석해도 온유리라는 인물이 업무 면에서 얼마나 답답한 사람인지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일만 못하면 그래도 낫지. 사과도 꼬박꼬박 하는 탓에 대놓고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실수도 한두 번이어야 눈 감고 넘어갈 수 있는 법. 일은 꾸준히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늘어놓으니 점점 사람이 별로로 보이기 시작한다. 착한데. 성격은 참 착한데. 그 성격 때문에 비호감으로 등극해 버리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온유리라는 인물을 까냐면 말이다. 그에게서 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 말하던가. 이 말,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야 큰 깨우침을 얻은 느낌이다. 유레카! 물론 영어로 비즈니스 메일 정도는 보낼 수 있다. 날밤을 새고도 다 읽지 못할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으는 걸 자료 조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온유리에게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던 건 다름 아닌 착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설명할 때 '착하다'라는 형용사는 웬만해서는 빠지지 않는다. 자랑은 아니고. 처음에는 그게 마냥 좋은 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능력 하나가 더 동반되어야지만 좋은 점으로 보일 수가 있더라. '잘한다'라는 능력 말이다. "일 잘하는데 착하기까지 해"와 "일은 그럭저럭인데 착하긴 해"의 뉘앙스 차이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의 착함은 플러스 알파인 반면 후자의 착함은 하자를 애써 보수하는 느낌이랄까.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작년 여름이었다. 배정받은 부서는 티켓 파트였고, 종일/오후와 소인/대인에 따른 정가와 카드사별 할인율을 모조리 외워야 했으며 같은 계열사에 근무하는 손님이 오면 회사별로 다른 티켓 발권 장소로 안내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돈을 다루는 부서이니만큼 시재 점검에 철저해야 했기에 시재가 맞지 않을 때에는 바사삭 부서지는 멘탈을 겨우 잡으며 몇 번이고 다시 시재 점검을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첫날에는 뭣도 모르고 의욕 만땅이었는데 일하면 일할수록 딱 한 가지만 생각나더라. "그만둘까."


 처음 한 달까지는 엉망진창인 내 일처리를 아직은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럼 두 달째부터는? 정당한 이유는 핑계가 되었고, 이제는 그런 핑계 따위 통하지 않았다.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맡은 업무를 100% 소화해낼 수 있기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은 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2일 근무자였던 나에게는 예외였나 싶다. 두 달이 다 되어갈 때까지 나는 선배의 도움이 필요한 신입이었고, 학업과 병행이 힘들어 일을 그만두었던 세 달째까지 끝내 신입 티를 벗지 못했다.


 실수하게 되면 할 수 있는 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손님에게도 굽신, 상사에게도 굽신. 3개월 간 내가 100% 소화해낼 수 있었던 건 사과뿐이었다. 그런 내가 너무나 싫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덜떨어진 취급을 받지는 않았는데, 이곳에만 있으면 내가 너무나 찌질하게 느껴졌다. 일은 못하는데 착하기만 한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너 대체 아는 게 뭐야?


 마지막 근무 하루 전날 선배에게 들은 말이었다. 선배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듣고 웃어넘겼지만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나 진짜 아는 게 뭐지. 일주일에 이틀만 일했다 치더라도 근무일수가 열흘을 훌쩍 넘기는데 왜 아직까지도 일처리를 똑바로 못할까. 결국 나는 마지막 근무 날까지 그 선배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선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3개월의 경험은 나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조별과제를 할 때도 조원들 사정 다 이해해 주고 궂은일 도맡아 하는 조장보다, 다소 냉정하더라도 조원들 능력에 맞는 일을 분배해서 결과물의 완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조장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착한 사람이 일 잘하면 성인(聖人) 대접을 받고, 일 못하면 호구 취급을 받는다. 뼈저리게 느낀 사회의 규칙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게 급선무다. 내가 정해둔 진로는 딱히 없지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잘하자. 착하기만 하지 말고 잘하면서 착하자. 아니다. 잘하기만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업무상으로는 일 잘하는 게 곧 착한 거 아닌가. 그러니 잘하자. 그러고 나서 착하자.


괜히 어설프게 보은하려고 하지 마라.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능력도 없는 놈이 도와준다고 설치는 것만큼 민폐도 없어.
_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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