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저를 보고 나서"볼까?"가 아닌 "봐야겠다!"를 외치는 영화는 나에게 딱 두 부류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거나, 좋아하는 장르거나. 이 작품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용식 씨에 '멜로가 체질'의 진주 작가까지 나오다니. 어쿠스틱보다 힙합을, 멜로보다 사이다 스릴러를 찾을 만큼 내 마음이 잔잔한 감성과 동떨어진 요즘이지만 한치의 망설임 없이 개봉일에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결정에는 시험을 무사히 마침으로 비롯된 보상심리 또한 한몫했지만... 그냥 티저가 홀릴 만큼 좋았다고 말할래.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2003년, 올해로 세 번째 수험생활을 시작한 (어쩌면 강제 시작당해버린...) 삼수생 영호. 지금은 닭장 같은 입시학원에서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쫓기듯 보내고 있지만 그에게도 한때 순정이란 게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개수대에서 자신에게 선뜻 손수건을 건넨 여자아이. 이 순간은 시간이 흘러 영호의 머릿속 켜켜이 쌓인 희미한 추억들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공소연. 어째서인지 영호는 소연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공부 말고는 모든 게 재밌을 삼수생 영호는 소연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알아낸 뒤 곧장 편지를 보낸다. 서울으로부터, 부산까지.
영호의 기대와 설렘을 담은 편지는 소연을 향해 부산에 도착했지만, 예상과 달리 편지를 건네받은 건 소연의 동생인 소희였다. 소희는 병원에 있는 언니에게 편지를 전해주지만 안타깝게도 소연은 영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소희는 아픈 언니를 대신하여 답장을 쓴다. "미안하지만 기억이 안 납니다." 편지를 부치려는 찰나, 소희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해." 영호의 소중한 추억을 지켜주기 위함이었을까. 소희의 거짓말로 시작된 영호와 소희의 인연. 서울에서 귀여운 강아지가 날아오는가 하면 부산에서는 서울 하늘을 보는 마법을 부리는 등, 두 사람만의 추억은 편지를 통해 차곡차곡 쌓여 나간다.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던 영호는 문득 소연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첫 답장에서 약속했던 규칙들. "질문하지 않기, 만나자고 하기 없기, 그리고 찾아오지 않기." 그래도 우리의 영호, 용기를 내어 만나고 싶은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내고 만다. 편지를 읽은 소희는 처음 했던 약속을 잊은 거냐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결국 영호의 마음을 받아준다. 단, "12월 31일에, 그날 비가 오면 만나기로 해." 12월 31일에 비가 올 확률이 얼마나 될까. 터무니없는 제안에 적잖이 실망한 영호. 그러나 영호도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난 네가 좋으니까... 기다려볼게."
영호의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3년, 2004년, 2005년... 매년 12월 31일이면 우산과 편지, 손수건을 들고 초등학교가 있었던 공원으로 향하는 영호. 간절한 기다림으로 가득 채운 여덟 해가 흘러 어느덧 2011년도 끝을 향해 가고. 올해의 마지막 날에는 비가 내릴까. 그토록 기다리던 소연을, 영호는 마주할 수 있을까.
잊고 있었던 담백함을 찾아준 작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이른바 '19금' 작품들이 흥행을 이루고 있는 요즘이다. 그 흐름에 박차를 가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본인이기도 할 만큼 요새 나는 자극적인 작품들을 즐겨보는 편이다. 코로나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생겨서 그런지 몰라도 단번에 집중하기 쉽고 눈을 뗄 수 없는 전개를 펼치는 작품들이 시청자의 관심을 듬뿍 받는 듯하다.
자극적인 작품들의 홍수 속에서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담백함 그 자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어떠한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오로지 기다림과 기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시작과 끝의 시간대가 꽤나 차이가 나는 내용이다 보니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내가 접한 작품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잡은 적이 없었다. 담백하면 지루하거나, 지루하지 않으면 담백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예외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는 그저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집중을 도와준 것이라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내가 영호의 간절함에 동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N수 생활에 대한 고증이 완벽하다. 하하... 닭장마냥 오십 명도 넘는 인원이 한 강의실에 빼곡히 들어차 있질 않나, 강사가 수업 첫날부터 기 죽이는 소리를 하질 않나. 학원 씬 나올 때마다 내가 다 기 빨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며 탈출 욕구가 샘솟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국 펜을 다시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아직도 그때의 한이 남아 있었는지, 영호가 창 밖으로 모의고사 문제지를 집어던지는 장면에서는 내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고맙다 영호야!
향수를 일깨우기엔 아쉬웠고, 수진의 등장은 의아할 뿐
이야기는 2003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시대에 맞는 연출이 가장 중요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예고에 등장하는 가로본능 폰! 엄마 배에서 나와 세상 구경한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지만 그 시절의 핸드폰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엄마의 뚱뚱한 회색 빛깔 핸드폰으로 하던 폭탄 게임이 어찌나 재밌었는지. 가로본능 폰이 나오는 씬에서는 그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우선 인물들의 머리 스타일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 영호의 머리는 그나마 시대를 타지 않는 스타일이었지만, 수진의 시스루뱅이라든지 소희의 히피펌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런 부분을 압살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2000년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극에서 남자 배우들 상투 밖으로 삐져나온 짧은 구레나룻이랑 뒷머리 보는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강소라 배우가 연기한 수진이라는 역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골똘히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 분명 포스터에도 영호와 소희뿐이고 영화 홍보도 두 사람뿐이라 강소라 배우는 아주 잠깐 나오나 보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씬에 등장했다. 솔직히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영호와 소희를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수진의 등장이 반갑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어찌어찌 잘 맞추어 생각해 보면, 수진이 있었기에 영호와 소희의 사이가 더 애틋하게 보이고 두 사람의 기다림이라는 마음이 더 빛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넌 별 같고, 그 친구는 비 같아."라는 영호의 대사가 이 의견을 확인시켜 주는 느낌이기도 하고.
메마른 감성에 단비를 적셔줄 '비와 당신의 이야기'
언제 또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란히 주연을 맡는 작품을 보겠나 싶어 예매한 영화였고, 역시나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애틋한 그 시절을 잘 담아낸 듯하다. 특히나 12월 31일에 내리는 비라는 희박한 확률의 설정이 영화의 특별함을 더했다고 생각한다.
요즘같이 자극적인 작품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관객의 마음에 비를 내리듯 정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음식으로 치자면 떡볶이, 피자, 치킨만 먹다가 싱싱한 야채랑 소고기 잔뜩 들어간 샤브샤브 먹은 느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게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넷플릭스에서 봤더라도, 방구석 침대에 드러누워 작은 화면으로 보는 거랑 영화관에서 넓은 스크린에 보는 건 느낌이 천지차이니까 말이다. 이런 감성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봐줘야 느낌이 사는 것 같다. 어떤 영화가 안 그러겠느냐만은...
매운맛에 지쳤다면 한 번쯤 보러 가도 괜찮을 법한 담백한 맛의 영화다. 만약 보러 가신다면 영화 끝 쿠키 영상을 놓치지 마시라는 당부 말씀드리고 싶다. 쿠키 영상까지 보셔야 비로소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영화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