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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an 08. 2022

사람 냄새 나는 드라마를 찾는다면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2019년 여름께, OST만을 남겨둔 채 장렬히 전사한 드라마가 하나 있다. '멜로가 체질'이라고. 2학기 개강하고 캠퍼스에서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그때 처음 알았다. 드라마가 OST를 띄워줄 수는 있어도 OST가 드라마를 띄울 순 없다는 걸.


이듬해 코로나로 인해 OTT 업계는 호황을 맞고, 그 영향은 이 드라마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방영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나 또한 이맘때 처음 이 작품을 접했는데, 사실 내가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던지라 지루함을 자주 느꼈다.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를 부제로 내걸었던 만큼 인물들의 대사가 드라마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아마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찾아보지 않을 것 같던 이 작품을 내 손으로 찾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유튜브 추천 영상에 멜로가 체질 클립 영상이 떴고, 마침 볼 게 없었던 나는 무심코 클릭해버렸다. 그리고 몸소 느꼈다. 이 드라마의 원석은 다름 아닌 대사였다는 것을! 그 길로 바로 넷플릭스를 틀고는 두 번째 정주행을 시작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16부로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장르다. 하지만 마냥 달달하고 깨 볶는 드라마는 절대 아니고. 멜로 향이 첨가된 휴머니즘 드라마라 하면 얼추 알맞은 설명일 듯하다. 남들 사랑 이야기에 1도 관심 없는 본인인지라 멜로 작품은 잘 안 보는데, 이 작품은 보는 내내 거부감이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인 진주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 그리고 드라마 제작사에서 일하는 한주 모종의 이유로 은정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인기 작가인 혜정의 보조로 일하던 진주 어느  돌연 해고를 당하고 정신 놓은 나날을 보내던 와중, 드라마 감독 범수에게 연락을 받는다. 혜정의 대본과 달리 진주의 대본을 보면 가슴이 폴짝폴짝 뛴다며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듯이 기쁜 진주였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서른  어른의 모습에 걸맞은 대답을 내뱉는다. "얼마 줘요?"


은정은 감독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나태해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전 재산을 기부해버린다. 삶을 다시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나. 지인을 대신해 출연한 방송에서 배우이자 대학 동기인 소민과 재회하게 되고. 마냥 비호감이었던 소민의 행동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느껴지면서 소민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여자 사람 배우'를 제작해보기로 한다.


대학 시절 남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한주. 한 남자로 인해 인생이 일순간 꼬이게 된다. 덜컥 임신을 해버린 한주는 애인 승효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승효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며 이혼을 요구한다. "그럼... 내 행복은?" "한주야. 네 행복을 왜 나한테 물어?" 결국 싱글맘이 된 한주. 하지만 아들 인국을 위해 좌절하지 않고 일을 시작한다. 이리저리 치이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아들에게 든든한 엄마가 되기 위해 맡은 업무는 기어코 해내고야 만다.



'수다 블록버스터', 제목 값 제대로 하는 대사


진주가 범수의 드라마 협업 제안을 거절한 뒤 장면

그치만 우리 나이에 안 한다는 말

더 신중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회라는 게 그렇잖아. 주름이 다 뺏어가.

나이 먹을수록 잘 안 오잖아, 기회.

이 사회가 그래요.
...

그러고 보니까 안 하겠다는 말, 나 해본 기억이 멀어.

그게 뭐라고 그런 말도 못 하고.

왠지 슬프지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자기가 하겠다는 애들이 뒤에 백만 명이 서있어.


만취한 진주가 궤변을 늘어놓는 장면

은정아. 왜 부위별로 살을 빼?

뭐가 드럽게 맘에 들지 않아.

그래서 난 부위별로 살찌는 운동을 하고 있어.

자, 봐. 이건 엉덩이의 탄력을 없애주는 운동이야.

이렇게 쫙 퍼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족발 하나, 소주 한 병.

자. 이건 뱃살을 늘어지게 해주는 운동이야.

식스팩? 아니죠. 원- 팩.

이렇게 뒹굴어 주고- 치킨 하나.

힘들다고 소주를 거르면 안 돼요?


다큐멘터리 촬영 중 CF 감독이 은정의 동료에게 면박을 주는 장면

너, 저분 보고 개새X라며. 같은 종 아냐?

넌 달라? 넌 뭐 개 쓰레기 새X냐?

우리가 여기 몰래 들어왔니?

허가받고 정당히 일하고 있는 거야.

네가 걸리적거린 거라고!

얻다 대고 남의 귀한 자식한테 욕짓거리야!

얻다 대고 사람을 개로 만들어!

사람이야! 귀한 사람이야. 네가 뭔데 지X이야.


동생 지영이 진주에게 돈은 언제까지 없는 거냐며 묻는 장면

돈은... 계속 없는 거야.

지금은 공부하니까 없는 거야.

그러다 다행히 합격했어. 공무원 했어.

안정적으로 월급 들어와. 그럼 결혼하겠지?

그럼 집 구해야지. 그게 네 집이야? 은행 집이야.

또 없는 거야.

그래도 성실하게 20년 동안 죽어라 일해서 갚아.

근데 애가 있겠지? 애들이 대학 간대.

그럼 또 없는 거야.

착실히 일해서 애들 공부시켜. 근데 은퇴할 나이네?

또 없는 거야. (인생이 그냥 뭐 '없는 거야'네?)

그나마 이게 성공사례야.

널리고 널린 진짜 비극을 말해줘?



재밌긴 한데, 재밌어지기까지가 너무 어렵네


솔직히 말하자면 시청자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드라마는 아니다. 대사에 모든 매력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탓에 딴짓 않고 온전히 드라마에 집중해야지만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선을 끄는 스케일 큰 장면도, 자극적인 장면도 하나 없는 순수 100% 멜로드라마다. 그렇다면 시트콤처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드라마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소비층은 2030 세대이니까. 이 말인즉슨 4050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드물다. 부모님과 함께 재방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두 분 다 휴대폰 보고 계시더라.


담백해서 좋았지만, 담백해서 가끔은 지루했던 드라마였다. 그래도 그 아쉬움을 상쇄시킬 만큼 좋은 대사들이 많았고, 좋은 배우들도 많았다. 대사가 8할인 이 작품을 살린 건 배우들의 공이 정말 컸다고 생각한다. 특히 친구들끼리 도란도란 거실 소파에 앉아 만담을 나누는 장면이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은정을 돌보는 친구들의 우정은 부러울 만큼 보기 좋았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후속작이 나오게 된다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드라마보다는 짧은 호흡으로 관객의 집중을 더 쉽게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종종 이 드라마를 찾겠지만, 아마 서른 즈음에 꼭 다시 한번 찾게 될 듯하다. 지금의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이 작품의 숨은 매력을 그때에서는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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