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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an 01. 2022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딨어?

스물두 번째 기록

그냥 정의 내려지지 않고 싶은 게
제 모습인 것 같아요.


자신을 수식하는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구교환 배우의 답이었다. 그 짧고도 명쾌한 한 마디가 막 발사된 총알마냥 휴대전화를 뚫고 나와선 내 머리를 관통했다. 물론 화자의 직업이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임을 충분히 이해한 후였다. 작품마다 자신을 깎고 덧붙여 새로운 군상의 인간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에게 정의가 내려짐은 곧 족쇄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마다 특색을 찾기 위해, 때로는 남의 특색을 따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나의 세상 속에서 "정의 내려지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생소하고도 새로웠다.



어느덧 스물세 해를 가득 채운 나의 생애, 나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내려진 나라는 사람의 정의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나는 유난히 낯을 가리던 아이였기에 그런 정의가 내려지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발표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편했고 뛰어노는 것보다 구석에서 책을 읽어내리는 걸 더 좋아했으니 그닥 틀린 정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는 나를 둘러싼 수식어들이 나를 옭아매는 철창같이 느껴졌던 때가 종종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을 앞두고 장기자랑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끼 많기로 소문난 아이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은 뒤였고, 유별남과 평범함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한 아이들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친구들이 나에게 장기자랑에 같이 나가보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러겠다고 했다. 세 살 터울의 엄빠 아들이 장기자랑에 자주 참가당하는 인기인이었던지라, 그게 부러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집단이라는 게 늘 그렇듯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 금세 파다해진다. 내가 장기자랑에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아이들은 저마다 "네가 장기자랑을 나간다고? 네가?" 또는 "너는 진짜 안 어울리는데..." 등의 한줄평을 다이렉트로 꽂아버리고선 유유히 사라졌다. 필터 따위 없는 아이들의 세계란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한 것 같다. 분명히 그전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촌철살인 급의 평가를 받고 나니 괜히 위축되더라.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으로 몇 번 연습은 나갔지만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주제를 알아야지, 하고 그만뒀던 것 같다.


머리가 크면서 내가 가진 정의가 도리어 내 발목을 잡는 일은 허다해졌다. 중학교에 올라와 동아리를 들 때도 댄스 동아리에 들어 춤을 배워볼까 했지만 의아하게 바라볼 시선이 겁나 지레 발을 뺐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수학 시험을 망쳐서 한 단계 아랫반으로 떨어졌을 때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라는 수식어 때문이었는지 반 친구들 모두 놀란 눈치였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학교는 좀 다를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똑같았다. 새내기 첫 학기 때 이미지가 졸업 때까지 가는 거다. 고등학교 때 아주 잠깐 접했던 가야금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국악 동아리를 들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우리 학교에는 비슷한 동아리조차 없더라. 만약 국악 동아리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내가 그 동아리에 입부했다면, 아마 동기들이 나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지금과 다소 다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달랐겠지.


MZ세대 사이에서는 MBTI가 자신을 소개하는 명함이 된지 오래다. 아마 첫만남에 가볍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주제라서 그런 듯하다. MBTI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받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누군가에게는 MBTI가 골칫덩이 정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격은 사실 그렇지 않은데, 만나는 사람마다 MBTI라는 편견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족쇄가 된 정의랑 뭐가 다를까.


정의라는 게 참 편하기도 한데 불편하기도 하다. 생면부지에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보여줄 수 있는 편리한 지표가 되어줄 때도 있지만, 이따금씩 정의에 발이 묶여 내가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가 더 많다. 타인의 시선으로 왜곡되어 부풀려진 이미지를 애써 지키거나 깨부수기 위해 상상 이상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도 있고.


이 글을 쓰면서 새해를 맞이한 기념으로 올해는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타인을 정의 내리지 않아야 할 텐데 말이다. 1월 1일이라고 해서 여지껏 해왔던 버릇이 마법처럼 짠- 하고 고쳐지진 않을 걸 안다. 이미 내게는 12월 32일이 된 지 오래이기에... 그냥 열 번 고칠 거 두 번 고치고, 그다음에는 다섯 번 고치고 하다 보면 어느새 완전히 고쳐져 있겠지.


이제 완연한 20대 중반에 들어섰다. 작년에는 아직 초반이라고 비벼보기라도 했는데 올해는 그냥 체념해야겠다. 하지만 나이라는 정의에 삶을 휘둘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스물넷인데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에는 늦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접어두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자.


원래 그런 사람은 없고,

원래 그런 나도 없다는 걸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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