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기록
근래 이사를 했다. 이전에도 우리 가족의 이사는 몇 번 있어 왔지만 내가 여덟 살 전의 일들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게 태반이다. 그래서 체감상으로는 내 인생 처음으로 이사를 겪은 느낌이 든다. 내가 직접 짐을 정리하고, 이사 갈 집의 내 방에 어떤 가구들을 놓을 건지 고민하고, 전체적인 톤은 어느 색으로 맞춰야 좋을까 생각하고. 처음으로 내 방을 꾸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터라 취향이 어느 정도 확고해진 20대가 된 만큼 나의 취향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방을 만들고 싶었다.
10년 넘게 살았던 전 집의 내 방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다. 초등학교 1학년의 감성이 충만한 연분홍빛 바탕 벽지에(심지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법사들도 그려져 있었다!) 내 키보다 큰 원목 책상과 책장, 시트지 가장자리가 덜렁거리는 연두색 4단 서랍장까지. 침대는 말해 뭐하겠나. 오로지 어머니의 감성으로 엄선된 화려한 꽃무늬 이불이 존재감을 톡톡히 드러냈다. 세세히 묘사하려면 한나절도 넘게 걸리니까 그냥 한 마디로 축약하겠다. 그 방은 나의 역사였다.
스물을 넘겼는데도 이런 유아틱한 방에서 여가를 보내야 한다니. 그렇다고 사비를 들여 방을 뒤엎을 엄두는 감히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이사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티끌의 아쉬움조차 보이지 않은 채 활짝 웃음을 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가 엄선해서 방을 꾸미겠다는 각오와 함께 핸드폰에 인테리어 어플을 설치했고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를 모두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또 아파트의 평면도를 찾아내서는 3D로 내 방을 꾸며 보기도 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면 언젠가 이 방을 그리워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감정은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에 고개를 숙였고, 이사 전날까지도 난 기대감에 부푼 채 잠을 청했었다. 책상과 책장이 원목이니까 그 위에 올릴 소품들은 화이트톤으로 맞추는 게 낫겠다, 하며 수험생 때보다 더 열심히 머릿속으로 내 방을 인테리어 했다.
이사는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가구만 옮겨다 놓으면 끝날 줄 알았던 이사는 일주일이 다 되어가도록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납하는 공간이 바뀌어 버리니 모든 짐을 풀어놓고서는 새로운 수납공간에 집어넣어야 했고, 구매한 침대가 오는 날까지 온 가족이 거실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가구가 설치될 때마다 발생하는 소음은 생각보다 날카롭게 신경을 자극했다. 그렇게 모든 가족의 피로도가 절정에 치달을 때 즈음에서야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내 방의 인테리어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플랜 A대로 완성할 수 없었다. 3D 인테리어 어플로 봤던 것보다 실제 가구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더 컸던 터라 줄곧 생각해 왔던 인테리어를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눈여겨보던 두어 개의 가구들이 내 방 인테리어에서 빠지게 되었고, 나 또한 허탈함에 빠졌다.
새 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를 기민하게 만들곤 했다. 여간 예민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지만 화장실의 불빛조차 나를 주눅 들게 만들지는 정말 몰랐다. 전에 살던 집의 화장실 불빛은 전구색이었는데 난 그 빛깔을 참 좋아했다. 자잘하게 난 트러블도 전구색 불빛 아래서는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태기를 느낄 때마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 얼굴답지' 하며 위안을 삼았었는데, 이제 그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주광색 불빛에서의 내 얼굴에 적응하는 게 어려워 며칠간은 거울을 보지 않고 화장실을 쓰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난 이사 온 동네 안에서 매일을 헤맸다. 이쪽으로 가면 길이 있겠지 싶어 걸었는데 다다르고 보니 막다른 길이었고, 저쪽으로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겠지 싶어 걸었는데 평소 다니던 길보다 삼십 분을 뱅뱅 돌아 녹초가 된 채 집에 도착하곤 했다. 땡볕에 고생한 몸을 침대에 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환경에 그저 설레기만 했던 내 모습이 너무 어렸다고.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멋지게 도약하고자 했지만 결국 화장실 불빛에조차 기민한 내 모습이 마치 우물 밖을 벗어나 더 큰 우물에 갇힌 개구리 같았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다행히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다. 그래도 이곳저곳 둘러보기 위해서 전보다 산책을 자주 나가기는 한다. 인테리어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난 나의 조그마한 방이 너무나 마음에 들고, 화장실 거울도 이제 걱정 없이 쳐다볼 수 있다. 인간은 역시나 적응의 동물이라는 걸 몸소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동안 너무 변화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도 같고. 이렇게 자잘한 것에도 일일이 감정을 소모하니 말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변화에 무던해질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다. 스물 하고도 셋이지만 아직도 변화가 낯설고 두려운 내 모습이 어딘가 찌질하게 보인다. 언제쯤 어른이 될 수 있으려나!
*Cover photo by Ryu Or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