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과 불안을 흘려보내고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타인의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칼 구스타프 융
그렇다. '신경을 건드리는' 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칼 융의 수많은 명언을 끌어안고 살면서 동시에 그가 자연 속에 숨어들기 이전의 사생활(불륜을 일삼던)은 나의 신경을 건드린다. 칼 융 덕분에 나는 투명성과 도덕성 두 가치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려고 들른 카페의 조도와 선곡이 나의 신경을 조곤조곤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집 근처에서 맛이 좋고 신경을 덜 건드리는 카페는 이곳뿐이다. 씩씩하게 들어온 두 남녀는 카페 사장님의 말을 세 번이나 무시했다. 세 번째 "드시고 가세요?"라는 물음에 " 아니 좀 잠깐만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은 지금 만석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그들은 메뉴를 보고 원하는 게 있으면 주문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오븐과 로스팅기가 동시에 돌아가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더해져 감각이 곤두섰다. 그중에서 가장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은 "아니 좀"이었다. 그의 무의식이 내놓은 불쾌한 결과물이다. 다음 문장이나 태도가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길 바랐다. '아니 좀'에 대한 실망감을 그 사람 자체로 확정 짓고 싶지 않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건 왠지 싫으니까. 인간은 열이 다가 아니니까. 그러나 칼 융의 말처럼 인류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맞다. 디카페인은 왜 맛이 한 가지냐, 다른 디카페인 메뉴는 무엇이냐 디카페인 관련 질문만 수차례 해놓고 그들은 일반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게다가 얼마나 현란한 백스텝을 밟은 건지 화분을 건드리곤 흙이 다 흘러내려도 못 본 체 나가버렸다. 둘셋을 보아도 백을 알 것 같은 짐승이었다. 어렸을 때 <쟁반 노래방>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저런 놈에게 수시로 쟁반이 떨어져 정수리를 갈겨주었으면....' 상상해 보았다. 사장님은 홀로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 '장사는 원래 이런 거야. 그럴 수 있어.' 타협의 대가는 무엇일까. 그의 얼굴은 한소끔 끓었던 냄비를 막 싱크대에 넣은 것처럼 췩췩 소리를 내더니 허연 연기가 피어오른 뒤에서야 잔잔해졌다. 이면에 무언가가 함께 식어가는 눈빛이었다.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을 나열하면 팔만대장경은 될 것이다. 환승연애의 엑스룸에서나 존재하는 이별 카톡처럼 지난하고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다. 지금의 나는 어쩌려고 몇 년간 사진 작업도 하지 않고 여전히 거슬리는 감각만을 현상화하며 살고 있는가. 불편의 이야기 만으로 이만큼 썼으니 뒤엎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다. 나를 이해하는 불쏘시개로 써야지.
요즘 나는 가족들을 '세모집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뾰족한 구석이 있는 세 사람이 실제 세모지붕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모집 사람들은 집에 돌아오면 신발에서 뒤꿈치가 나오기도 전에 '오늘의 부조리함'을 토로한다. '양날의 검 탑 10' 또는 '오늘의 민원' 같은 것도 쏟아낸다. 밖에서 느낀 호불호를 빠짐없이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다. 세 명의 오디오가 겹치면서 시끄럽다고 이마를 짚거나 손사래를 친다. 오늘의 민원일지는 “누군가 딱밤 때리듯 던진 담배꽁초가 종이 쓰레기에 옮겨 붙어 불이 난 거야! 발로 밟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지. 근처 가게 사장님께 물을 부탁했는데 너무 조그만 저그에 물을 떠 오셔서 세상 불안했지 뭐야. 이후 바로 민원을 넣었고 어째서인지 '흡연'이라는 이유로 '건강증진과'로 전달되었다는 거야”라는 이슈다. "이토록 거시적인 처리가 있나" 대답하자 틈을 치고 들어온 아이는 “학교에서 리코더 시험을 봤는데 (평소 다른 아이들을 깎아내리며 놀리는 ) 00 이가 "넌 절대 합격할 리가 없지."라고 해놓고 히말라야에 사는 흑염소 울음소리 같은 연주를 했거든! 친구들이 웃음을 참느라 크흠크훔 숨소리로 교실이 가득 찼어. 홀로 재시험에 당첨되어 묵은 증오가 녹아내렸다니까” 이어서 남편은 일터에서 만난 무책임한 태도 30가지 정도를 읊으며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야지 모르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모르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물어봐"로 이야기는 귀결되었다. 이후 영화, 책, 맛있는 음식, 산책길, 날씨 같은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낸다. 오늘 있었던 카페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문득 이런 장면이 그려졌다. 카페 사장님이 마감 후 치킨을 뜯으며 아내에게 미주알고주알 오늘의 일을 고자질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상상만으로도 귀여운 모습이 아닌가. 코믹, 호러 그 어떤 장르가 되었든 무언가를 얻었든 잃었든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그건 '좋은 날'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에 나빴던 기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다시 풀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정제된 나를 만나게 된다. 흘려보내고 걸러내는 과정이 마치 커피나 차를 내리는 행위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일일시호일>의 주인공 노리코는 말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일은 지나가도록 두면 된다.
그러나 금세 알 수 없는 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깨달아 간다'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과 자잘한 기쁨, 슬픔은 식탁에 앉아 떠들면서 지나가도록 두면 된다. "결국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야." 확인하면서. 그러나 금세 알 수 없는 일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모양인 우리가 겪어 내야 하는 삶의 풍파, 염원하던 일의 실패, 나이 듦, 건강, 상실 같은 것. 호불호를 안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지 않는 먹고사는 일, 잘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양육 방식이나 교육관, 쌓일 길이 없는 통장과 띄어 쓰게 되는 이력 같은 것. 노리코는 취업에 실패하고 결혼 예정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질투하던 사촌은 결국 취업에 성공해 곁을 떠났고, 유일하게 응원해 주시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에서 사십 대 중반까지 노리코의 삶 속에 지속성을 가진 것은 다케다 선생님에게 다도를 배우는 일이다. 좇던 꿈이 아니라 이유도 모른 채 다가 온 다도는 반복과 몰입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게 한다. 오래 보아야 매 순간이 다른 다도실, 엄격한 형식 속에서도 너그러움을 가진 다케다 선생님의 존재는 불행을 마주할 힘을 갖게 한다. 노리코는 다도실에 붙어있는 족자 '雨聴'(우청)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비 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동원해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맛본다
눈 오는 날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매일이 좋은 날'은
그런 뜻인가?
다도를 처음 배우러 갔던 날에 보았던 족자의 말 '일일시호일'은 스무 살 노리코에게는 허황된 말처럼 느껴진다. 세월이 무르익고 다도가 몸에 밴 뒤에야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온 감각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
"엄마 글 쓰니까 조용히 해" 검지를 입에 대고 쉿 쉿 거리던 남편의 핸드폰은 2초 단위로 알람이 울려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빠가 제일 문제라고 다 같이 웃으면서 이 또한 흘려보냈다. 저녁을 먹으며 한바탕 떠들고 말갛게 씻은 뒤 침대에 눕자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은 씻겨 나가고 없었다. 아이는 블라인드를 살짝 걷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고래밥이라는 과자가 박스 타입이잖아. 왕 고래밥이라고 봉지 타입이 나왔거든 그건 한 개만 먹어도 박스타입의 한 움큼 먹은 것만큼의 식감을 느낄 수 있어!"
"엄청 추운 날 창문을 살짝 열고 두꺼운 이불속에 있으면 이상하게 더 포근한 그 느낌 알아?
"엄마 잠옷 냄새, 설날 냄새랑 비 오는 날 숲 냄새, 아욱국 냄새... 좋은 냄새"
아이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고 아삭! 왕고래밥을 씹어 보았다. 창문을 살짝 열고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렸다. 서로의 잠옷 냄새를 맡으며 내일은 아욱국을 끓여주겠다고 말했다. 금세 알 수 없는 것들은 결국 같은 자리에 남아있는 자신, 깊이 감각하고 반복하면서 걸러진 '나를 아는 내'가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이러한 믿음이 솟구쳤다. 슬픔, 상실만큼이나 자신을 향한 믿음에도 익숙해질 차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