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이의 아부지
이창숙(배우 박인환): 부정의 아버지 언제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자랑할 게 없어도 자랑스러운 내 아부지. 따뜻한, 선하고 순하고 현명한, 하나뿐인 딸이 문학이고, 법이고, 종교인, 생활력도 강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랑하는 내 아부지. 세상에 대한 미움이 없는, 선물 같고 기적 같은 사람.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 그래도 바지춤 꼭 붙들고, 폐지를 찾아 서울을 뱅글뱅글 돌면서 어제처럼 오늘을 살아내는, 거의 완전한 인간.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소개를 읽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이자 습관이다. 지금껏 50번도 더 읽었던 캐릭터가 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새벽 네 시의 자갈치 시장을 찾았던 것처럼, 드라마 <인간실격>의 이창숙을 들여다봤다. 김지혜작가는 창숙을 '거의 완전한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알기에 투명하고, 염치를 알기에 성실한 사람. 어느 시대에 살았어도 삶을 대하는 태도나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뀔리 없는 사람. 창숙이 나의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바라고, 섬세한 부정이가 의지할 구석이 창숙이라 다행이었다. 어째서 세상에 대한 미움이 없는 사람들이 매번 기억을 잃어가는 역할일까. 어째서 자랑할 게 없는 위치에서 원망하지 않고 존재할까. 창숙은 부정이가 자신의 전부였던 출판사를 그만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창숙은 누구에게 따져 묻거나 파고들지 않는다. 체기를 느끼며 어딘가에 걸터앉을 뿐이다. 창숙은 사위를 만나 한 가지를 부탁한다. 부정이를 자세히 봐달라고.
들여다본다는 것은 밖에서 안을 보는 행위이다. 부정의 남편은 같은 집에 살아도 부정의 밖에 있다. 좀 더 자세히 봐달라고, 살펴봐 달라고, 나아가 알아야 할 것을 알아달라는 처절한 부탁이었다. 창숙은 이런 부탁을 늘 있었던 하루처럼 건넬 수 있는 사람이다. 폐지를 팔아 번 돈 (천 원짜리 스무 장)을 사위'정수'의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아이처럼 웃는다. 창숙을 통해 정수는 생경한 아픔을 맞본다. 그럼에도 창숙의 미어지는 속이 보다 더 거대하고 무거워서 억울할 틈이 없다. 너는 남편이 돼서 그런 것도 모르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창숙의 화살은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으므로 거의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고 따라서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그의 선함과 올곧음이 자식에게는 삶의 지표이자 처벌이다. 창숙이 가진 힘이 이불처럼 온 세상을 덮어주었으면, 거울처럼 자각하게 했으면 바랐다. 서로를 들여다보게 할 수 있는 온기가 온전히 '선의'로 수용되기를 창숙을 통해 투사하곤 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부정이와 강재의 대화는 내 속을 꺼내 쟁반 위에다 펼쳐 놓은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크고 작은 모든 것을 깊이 끌어안고 산다. 그 많은 것을 관조하면서도 하루 몇 시간은 가사도우미로 역할 대행으로 살아간다. 심장에서 물이 졸졸졸 흐르기도 하고 엄마가 같이 있는데도 보고 싶어 하면서,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 하면서, 이젠 죽어서 입도 없는 사람의 험담은 하지 말라고 화도 내면서 그러다 서로를 알아본다. 창숙도 모르는 것들을 서로 알아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투명한 창숙이 있다. 창숙은 길을 잃은 이들의 제동장치가 된다. 잊을만하면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바꾸거나 극적인 변신을 꾀하지도 않고, 꿈꾸던 복수를 완결하거나 파멸하지도 않고 드라마는 흘러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창숙을 잃은 시점에 모든 캐릭터의 인생은 다르게 정돈된다. 마치 창숙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조각내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처럼. 환경이 통찰을 주기도 하는 것처럼.
들여다보는 것이 알아채는 것과 다르듯 투명함은 솔직함과 다르다. 투명함은 예측가능성이다. 민감한 사람들에게 투명함은 배려이자 사랑의 증거가 된다. '난초- 민들레 이론'에서 말하듯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민들레형 아이들에 비해 난초형 아이들은 적절한 환경조성이 필요하고 부모가 몸과 마음을 많이 써야 한다. 난초형 아이였던 나는 환경적 배려를 받지 못했고 자주 심장이 두근거리는 채로 살아야 했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아이로 살아야 했다. 나만큼이나 민감한 아이를 낳아 보니 아이의 눈빛에서 어린 나를 발견한다. 그럴 때마다 창숙을 생각한다. 자칫 깨지고 부서져 어딘가 잃어버렸지만 그것도 나라는 것을 몸소 선보이며 살아야지. 너는 살게 하는 아이라고 말해줘야지. 창숙이 그랬듯 너의 처지를 몰랐음에 아파할 나이길 바란다. 아플 각오만큼이나 투명한 사랑을 나는 알지 못한다. 속절없는 고통으로 가지 않고 자신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투명한 사랑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선지 '모서리로 서기'는 사랑을 하기 위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가끔 연애, 부부, 가족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보면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자기애를 사랑이라는 것을 통해 얻어가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돌아보면 지금의 가족애를 형성하기까지 나의 모서리를 다 갈아 없애야 살아지려나 싶은 절망의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생겨먹은 기질이 그랬다. 회피보다 자책이 더 쉽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도 내손으로 해결하고자 하니까. 창숙을 보면 답이 있다.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다고 해서 자신이 갈아 없어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창숙은 고르고 고른 말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고 바지춤을 부여잡고 다시금 나아가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형체와 싸울 때, 타인에게 그것이 무용하게 보일 때 우리는 예술에 의지하고 답을 찾는다. 부정은 아부지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라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한텐 괜찮다가 걱정이고 예쁘다는 건 근심이에요.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 마음속엔 모든 게 다 있어요. 법도 철학도 문학도, 다 아버지 마음속에 있어요.
누가 가르쳐 준 적도, 배운 적도 없는데 차곡차곡 쌓였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한테는, 아버지 마음속에는 말보다 생각이 훨씬 많거든요.
오랫동안 생각한 수많은 생각 중에
고르고 골라 몇 개만 말이 되어서 나와요.
작품을 깊이 사고할 때 선명해지는 지점이 있다. 이 과정이 민감성을 다루어 내고 핵심가치를 드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들여다본 사랑은 킨츠키와 창숙에 가깝다. 본질을 알아보는 것, 오랜 시간 머물도록 만드는 여정, 변주를 허락하는 내재성과 고유성. 몸소 느끼고 행하는 모든 궤적이 긴 시간을 지켜낸 유산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부정의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아이에게 하나뿐인 시집이 되고 싶었다. 연을 끊었던 나의 아부지는 창숙처럼 치매가 시작되고 폐렴으로 이어져 돌아가셨다. 약해진 정신과 장기가 육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때에 나는 아버지를 창숙처럼 보려고 했다. 어리석은 아부지의 마음 깊은 어딘가에는 부정이처럼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 믿었다. 나를 키우기 위해 창숙처럼 낡은 패딩을 입고 기름 냄새나는 사무실로 매일 나섰던 아부지를 떠올렸다. 창숙이라는 캐릭터가 내게 몸소 보여주었다. 미움보다 사랑을 확인하라고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보내주라고.
<인간실격>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불안정한 처지를 갖고 있고 이상 실현에 실패했다. 무언가 되어있을 줄 알았던 자신이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것이 실패라고 믿었기에 방향을 잃어버렸다. 창숙은 그들 중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 소망을 갖고도 단단한 뿌리와 중심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다. 부정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부정은 뒤늦게 깨닫는다. 창숙의 죽음은 모두를 울렸다. 드라마 내내 그가 주었던 위로가 스며들어 내겐 없었던, 내가 바랐던 사랑의 형체가 세상을 떠났지만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장례식은 부정의 뒤를 따르는 롱테이크 씬으로 연출되었다. 조문객이 온돌바닥에 앉아 국을 떠먹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유리창 사이로 입관을 지켜보는 부정이의 눈물, 흰 리본을 단 채로 정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부정, 아버지가 살던 오피스텔을 팔던 날 창숙의 죽음을 전해 듣는 강재, 아버지와 이별하는 내내 그에게 보내는 편지가 부정의 여린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게 아부지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어디서부터 잘못됐었던 걸까요
아부지 나는 이제
죽음이 뭔지
산다는 건 또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죽는 일도 사는 일의 일부라는 걸
그땐 왜 알지 못했을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수 없지만
아부지 나는 이제야 아부지가 제게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 왔었다는 걸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어요
사랑하는 아부지
부디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