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친구의 애완조를 소개합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 순간!
"깍~깍~깍~깍~"
여느 때처럼 날 몹시 반겨준다. 물론 본인은 정말
날 반겨서 내는 소리가 아닐지도 모른지만.
소리만 듣고서 집에서 까마귀를 키우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친구는...
말을 잃은 앵무새 '지옹이'다.
"깍~깍~깍~깍~"
"지옹아~ 조용히 안 할래? 조용~!"
매번 집에 들어갈 때마다 지옹이의 인사와
여자 친구의 호통 소리가 같이 들려온다.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고 거실로 들어가면
지옹이는 보통 TV 위에 앉아 있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다.
새장이 있지만 새장 말고도
지옹이가 즐겨찾기 해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TV 위와 빨래 건조대 그리고 소파
특별히 한 군데 더 하자면 방문이 열려있을 때
문 위쪽에 있는 것도 좋아한다.
즐겨 찾는 장소들 주위엔
어김없이 배설물과 털들의 흔적이
고고학 유물처럼 아주 생생하게 남아있곤 한다.
집에 있을 때야 지옹이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 싶으면
바로 제지를 하고 새장 주변의 허락한 구역에서만
볼일을 보도록 지시를 하지만
집을 비운 사이에 벌인 일들은 제지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종종 소파에 뭍은 배설물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앉아 옷에 묻거나
건조 중인 빨래 위에
볼일을 봐 놓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후자의 경우 지옹이는 거친 가사가 돋보이는
여자 친구의 폭풍 랩을 듣게 된다.
옆에서 듣는 나도 살벌해질 정도지만
그 마음 나도 이해한다.
세탁 후 처음 입는 흰 옷에
김칫국물 튀긴 기분이랄까?
어쩌면 그보다 더하면 더할 것도 같다.
지옹이의 수난시대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을 때면
어느새 다가와 손가락 위로 올라와 있다.
새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발이 움켜쥐는 악력이 생각보다 강하다.
발톱도 길고 날카로워서
사람 손가락처럼 살이 없고 얇은 부위는
팔이나 다리에 올라왔을 때에 비해 훨씬 아프다.
실제로 발톱 때문에 상처가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손위로 올라왔을 때면
간디에 버금가는 비폭력주의자인 여자 친구도
거의 맞짱 붙을 기세로 공격을 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지옹이가 도망을 가고
처음에는 그 모습이 측은하고 불쌍하기도 했는데
나도 당해본 다음부터는 그런 마음은 절대! 들지 않았다.
이런 모습만 보면
지옹이는 여자 친구의 애물단지이자
사고뭉치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앞서 나온 특정 상황들만 제외하면
지옹이는 아주 귀여운 친구다.
여자 친구도 지옹이를 상당히 귀여워하고 예뻐한다.
가끔 내가 좀 짓궂은 장난을 치려고 하면
괴롭히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자기 자식은 자기가 야단치듯이
내가 뭐라고 하려고 하면
왜 지옹이한테 그러냐며 오히려 나를 꾸짖는다.
그래서 가끔... 서러울 때도 있고
앵무새에게 의문의 1패를 한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곤 한다.
밥을 먹을 때 둘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밥을 먹고 있으면 지옹이가 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식탁으로 걸어온다.
"어허! 어디 사람 식사하시는데!"
기본적으로는 접근을 못하게 막지만 남은 음식이나
혹은 지옹이가 깔끔하게 먹을 수 있을 만한 것들,
주로 야채나 과일이 있으면 조금씩 주곤 한다.
영락없이 부모가 자식에게 밥을 먹이는 그림이다.
이렇게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챙길 건 챙겨주는
알콩달콩한 모습들을 오랜 시간 옆에서 봐왔다.
그리고 나 또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지옹이와 함께 살아오고 있다.
처음에 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봤을 땐
"이럴 거면 왜 키워? 그냥 다시 파는 게 어때?
서로 스트레스 안 받고 좋을 거 같은데"
라고 물은 적이 있다.
여자 친구의 대답은
"안돼. 지옹이는 우리 가족이야"
생각해보니 그랬다.
가족끼리도 안 맞는 것이 있으면 다투고 화해하고 좋을 땐 좋고 싫을 땐 싫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 삶의 방식도 달라서
의견 마찰이 생기기 십상이고
서로 양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처럼 말만 못 할 뿐이지
지옹이도 마찬가지였다.
흔히들 동물을 키운다고 말하는데
더 이상 키운다는 표현은
적합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우리는 모두
이 곳 지구에서 현재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사람이 동물들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
먹이를 주고, 배설물도 치워주고,
그렇기 때문에 키운다는 표현이
당연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우리도 동물들에게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통한 행복을 준다.
외로운 사람들은 애완견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한다.
안내견들은 눈이 불편한 사람들의
눈이 되어 준다.
농장에서 지내는 동물들은
달걀이나 우유 같은 식량을 만들어주고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농장에서 사람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비록 이런 것들이 우리가 동물들에게 해주는
단순히 먹고 자는 1차원적인 요소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주는 것들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큰 가치가 있는 것들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봤을 때 우리는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요즘은 살기에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사는 것은 힘든 시대가 되었다.
물질적, 기술적인 면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한 현상이나 문제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나에게도 어느새 또 하나의 가족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옹아~ 내가 다시 말 가르쳐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