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Ⅴ
심히 고민이 됐다.
‘그냥 방에 있을까? 아니면 콧바람이라도 쐴 겸 나갔다 올까?’
이런 쓸데없는 주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크리스마스이브이기 때문이다. 나가자니 커플지옥이고 방에 처박혀 있자니 너무 외롭고 심심했다. 그래도 명색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말이다.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는 내 실루엣이 처량하고 한심하게 보였다.
‘그래! 그래도 스웨덴에서의 첫 크리스마스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그냥 이렇게 보낼 순 없지.’
언제 고민했었냐는 듯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최대한 부릴 수 있는 멋은 다 부렸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 날 수 있으니까.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 2003)’에서처럼. 물론 현실과 영화는 많이 다르겠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예테보리 중앙역 근처 ‘노르드스탄(Nordstan) 쇼핑몰’이 떠올랐다. 스웨덴은 물론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쇼핑몰로 핸드메이드 공예품부터 시작해 명품 브랜드, 빈티지숍,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까지 갖추고 있어 평일에도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만큼 커플지옥이라는 말 그대로 온통 팔짱 낀 커플들로 득실거리는 명동 거리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며 노르드스탄으로 향했다.
부랴부랴 나오기는 했지만 노르드스탄에 도착하니 벌써 폐점이 시간이 다 되어갔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평소보다 한산했다. 커플지옥이 아닌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왔는데 심심한 걸 불행이라 해야 할지... 내가 아는 한 예테보리 최고 핫플인데 여기가 이 정도라면 다른 어느 곳을 가도 내가 기대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고민 끝에 나왔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돌아가기는 싫었다. 유럽 하면 ‘광장‘이니 노르드스탄 근처 ‘구스타프 아돌프 광장(Gustav Adolf Square)’에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구스타프 아돌프 광장’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아돌프 2세(Gustav II Adolf)’의 이름을 딴 광장으로, 광장 중앙에는 당연히 구스타프 아돌프 2세의 동상이 있고 주변으로 예테보리 시청, 법원, 관공서, 시립 박물관 등이 있다. 예테보리에서 유동인구가 많은 광장 중 하나이다. 로컬들에게는 주로 만남의 장소, 관광객들에게는 관광명소다. 특히 밤에는 광장 옆 잔잔한 강물 위로 도시의 야경이 비쳐 제법 로맨틱한 분위기가 난다. 밤낮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광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구스타프 아돌프 동상만이 우두커니 서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반짝반짝 꼬마 전구가 거리를 비추고, 커플들 사이에 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렇지만 그래서 외롭지 않은 그런 거리를 기대하고 나왔건만 어쩜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에 어리둥절, 오히려 방에 있을 때보다도 더 쓸쓸했다. 이쯤 되니 상황을 받아들이게 됐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런 게 아니고 현실이 그런 걸.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나 홀로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만끽했다. 아무도 없는 광장,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셀피도 찍고, 캐럴도 흥얼거리며 발길 닿은 대로 걸었다. 달리 생각하니 이것도 참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한국에서라면 크리스마스에 절대 누릴 수 없는 고요함과 평온함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가 될 것 같았다. 살면서 한번 겪어볼까 말까 한,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스웨덴의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도 종교 기념일이기는 하나 공휴일의 의미가 더 큰 반면, 스웨덴의 크리스마스는 단순 기념일이나 공휴일 이상의 큰 명절 같은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한다.(12월 13일, 성녀 루시아를 기리는 루이사 데이-St. Lucia Day-라고 하여 이때부터가 사실상 스웨덴의 크리스마스 시작이다.) 또한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Jul) 테이블(bord), 합쳐서 ‘Julbord(율보드)’라고 하여 가족끼리 모여 크리스마스 음식을 먹는 전통도 있단다. 때문에 친구나 연인과 함께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밤거리가 그토록 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알고 나니 그날의 추억이 떠오르며 또 쓸쓸해졌다. 아, 나도 가족 있는데. 엄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