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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본능

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Ⅸ

by 트래볼러

인간에게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 본능이 있다. 아주아주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생존을 위한 안전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서열 문화에 길들여진 탓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소공포증이 있지 않고서야 대개 높은 곳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단다. 왜 드라마에서도 보면 직장 상사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나면 분을 삭이기 위해 찾는 곳이 건물 옥상이지 않은가? 옥상에서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개비 물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상사 뒷담화와 함께) 마음을 다독이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여행을 할 때도 높은 곳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은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자일 때 그 본능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에서 가장 높은 곳, 전망이 좋은 곳을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니곤 한다. 예테보리에서도 예외일 순 없었다.

창문을 열면 보였던 립스틱 빌딩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빨간색에 흰 줄무늬가 있는 빌딩이 있었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보니 유독 튀었다. 무슨 빌딩일까 싶어 찾아보니 이름은 ‘립스틱 컨퍼런스(Läppstiftet Konferens)’. 일명 립스틱 빌딩이라 불렸다. 빌딩 모양과 색깔이 빨간색 립스틱을 닮아 붙여진 이름인데, 근방에서 가장 우뚝 솟은 건물답게 꼭대기 층에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인데 고작 22층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예테보리에서는 충분히 마천루*(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아주 높은 고층 건물, Skyscraper)였다. 예테보리의 마천루이니 여행자의 본능이 꿈틀거려 도저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구글맵을 켠 채 다녔겠지만 이번만큼은 방향만 확인했다. 멀리서도 립스틱 빌딩 꼭대기의 빨간색이 잘 보였기에 대충 감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빨간색 꼭대기가 보이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골목을 휘저으며 걷다 보니 탁 트인 운하가 나왔다. 예타 운하(Göta kanal)였다. 이제부터는 운하를 따라 쭈욱~ 직진하기만 하면 도착이었다. 차가운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운하를 따라 걸었다. 한 선착장에 배들이 여럿 정박해있었다. 그중 ‘J19’라고 적힌 군함이 눈에 들어왔다. 군함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실제로 운용되는 건 아니었고 군에서 퇴역 후 현재는 ‘마리티만(Maritiman)’이라는 해상 박물관의 선박 컬렉션 중 하나로서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총 19척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운하에 전시된 배들 중 단연 가장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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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으로 이끌린 HMS Småland J19 구축함, 1979년 퇴역해 1987년부터 해상 박물관 컬렉션으로 전시되었다, 전시된 선박들 중 가장 크다고 함

군함에 한눈 팔린 나머지 삼천포로 빠질 뻔했다. 다시 립스틱 빌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예테보리 오페라 극장(Göteborgsoperan)과 바이킹 호텔(Barken Viking)이라는 유혹에 두 번이나 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유혹을 이겨내고 마침내 립스틱 빌딩에 도착했다. 한국인 감성으로는 립스틱보다는 여의도에 있는 쌍둥이 빌딩이 생각났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쌍둥이 빌딩이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샴쌍둥이 빌딩?(^^;;) 전망대로 올라가기 위해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입구 앞에서 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Only Weekday(평일에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오늘은 즐거운 주말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3PM]

퇴근이 오후 4시인 나로서는 평일에도 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4시면 해가 지는 겨울에는 상점이건 뭐건 일찍 닫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찍도 너무 일찍 닫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전망대로 예테보리 관광명소인데 말이다. 결국 고지를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만 타고 올라가면 됐을 것을. 높은 곳을 향한 본능을 충족시키지 못해 욕구불만만 잔뜩 쌓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쉬웠다. 립스틱 빌딩 뒤로 다리가 하나 보였다. 제법 높이가 있어 전망이 괜찮을 것 같았다. 꿩 대신 닭 심정으로 다리로 올라갔다. 전망대보다야 못하겠지만 썩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길 바랐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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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 오페라 극장과 바이킹배 모양의 바이킹 호텔, 또 본능에 이끌려 갈 뻔 했지만 다행히 사진만 찍고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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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바라본 릴라보멘(Lilla Bommen) 항구 (feat. 립스틱 빌딩, 바이킹 호텔)
밤에는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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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보면 샴쌍둥이처럼 가운데를 기준으로 쌍둥이 빌딩을 붙여놓은 것 같고(좌), 정면에서 보면 딱 립스틱(우)

다리 위 전망은 존망이었다. 생각보다 별로다 보니 립스틱 빌딩 전망대에 올라갔어도 별로였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문제는 한번 불이 지펴진 마천루에 대한 본능이 쉽게 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예테보리에 마천루는 립스틱 빌딩뿐일까? 호텔로 돌아와 꽁꽁 언 몸을 녹이며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상으로 립스틱 빌딩은 예테보리에서 3번째로 높은 건물이었다. 더 높은 곳이 2군데나 더 있다는 얘기. 이어서 제일 높을 건물을 검색했다. 최고 높이 29층. 고디아 타워(Gothia Towers)였다. 총 3개의 타워가 키 순서대로 나란히 있는데 그중 가장 동쪽에 있는 고디아 이스트 타워가 29층으로 예테보리에서는 1등, 스웨덴에서는 6등인 건물이었다. 립스틱 빌딩과 비슷하게 컨벤션 센터이기도 하면서 4성급 호텔이었다. 전망대는 따로 없었지만 25층에 통유리창으로 된 바가 있었다. 바로 여기였다. 내가 찾던 곳이. 역시 전망은 호텔이다. 이왕이면 칵테일도 한잔할 겸 해서 저녁에 가보는 걸로 정했다.

다리 위 존망, 아무리 내가 똥손이라지만...

저녁 식사 후, 고디아 타워에 왔다. 타워 바로 맞은편에는 리즈베리 놀이공원(Liseberg Park)이 예테보리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타워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 칵테일바에 들어섰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실내지만 실내가 아닌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칵테일 한 잔을 시키고 탁 트인 예테보리의 야경에 빠져들었다. 칵테일도 야경도 속이 다 후련했다. 낮에 얹혔던 체증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욕구불만 해소! 역시 답답할 땐 높은 곳이 최고다.

리즈베리 놀이공원(Liseberg Park)과 고디아 타워(Gothia Towers) 삼 형제, 맨 우측이 가장 큰 형(각각 24, 25, 29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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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은 확실히 서울이 더 화려한 듯, 그래도 높은 건물들이 없어 깔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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