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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은 넣어둬!

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Ⅵ

by 트래볼러

방에 한기가 돌아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혹시 창문이 열렸나 싶어 비몽사몽 뜬 실눈으로 창문을 보니 와우!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아주 몽실몽실한 덩어리들이 하늘에서 후두두둑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혼수상태였던 정신이 맑아졌다. 아침형 시체에서 아침형 인간으로 깨어났다.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깨끗이 쌓여있는 눈이 사람들의 발자국들로 망가지기 전에 내가 제일 먼저 밟고 싶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심보라고나 할까? 내가 밟는 건 괜찮지만 남이 밟는 건 싫었다.(참고로 결벽증은 없다. 결백하다!)


눈 내리는 스웨덴 거리를 걷고 있자니 크리스마스 로코(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한 손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멋진 금발의 여인까지 있었더라면 정말이지 딱 영화 속 남주인공인데.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은 한 손에는 우산, 팔짱은 셀프였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이 장면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낭만은 딱 여기까지. 눈이 정말 많이 왔다. 크리스마스 로코 영화는 순식간에 기상특보로 바뀌었다. MSG 좀 쳐서 몇 걸음만 걸어도 우산이 무거워질 만큼 굵기도 알차고 눈발도 거셌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외로웠다.(이방인 맞으면서^^;;)

스웨덴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는 이유는 우산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스웨덴의 우기와 관련이 있었다. 우선 스웨덴의 우기는 우리나라의 장마철 처럼 비가 자주 많이 내리지 않는단다. 대부분이 그냥 흐리기만 한 정도. 물론 그 와중에 비가 오긴 하지만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이다 보니 대개 모자를 쓰거나 그냥 맞고 다닌다고 한다. 비도 맞고 다니는 사람들이니 뭐 눈이 대수겠는가? 쌓이면 그냥 툭툭 털면 그만인 것을.

‘맞네! 눈은 툭툭 털면 그만이지.’

아무 데나 소박함을 갖다 붙이는 억지스러운 발상일지 모르겠으나, 이런 모습에서도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함이 느껴졌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모습. 그게 의도 됐건 아니건 자연스러운 생활문화로 자리 잡혀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우산은 고이 접어두고 모자를 뒤집어썼다. 이 얼마 만에 맞아보는 눈이던가? 일부러 눈 맞으러 나갔던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엄마가 밖에 눈 온다 하면 제일 먼저 물어본 게 “뽀드득 눈이야?”였다.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고, 조몰락조몰락 거리면 잘 뭉쳐져 가지고 놀기에 가장 좋은 눈. 난 그걸 ‘뽀드득 눈‘이라 부르곤 했다. 뽀드득 눈이 올 때면 온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때의 순수했던 동심은 어른이가 되면서 영영 떠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눈을 맞으니 집 나갔던 동심이 다시 돌아왔다. 물론 스웨덴이기에 가능한 일. 우리나라였다면 좁쌀 같은 싸리 눈에도 우산을 쓰고 다녔을 테니 말이다. 스웨덴에서는 스웨덴 법을 따라야하는 법! 스웨덴에 있는 동안만큼은 나도 우산은 캐리어 구석에 박아두련다.

아! 근데, 눈은 그럭저럭 맞을 만한데, 비가 걱정이다.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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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침략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 스칸센 크로난 (Skansen Kronan), 전망이 좋기로 유명해 예테보리 설경을 보러 올라갔다.
스칸센 크로난에서 바라본 눈 내린 예테보리, 여기가 바로 겨울왕국! 인투디 언노운~~~♬
우산은 넣어두고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된 예테보리에서 가장 오래된 구시가지 하가(HAGA), 공방이나 골동품점, 옷가게 등 아기자기한 숍들과 다양한 레스토랑, 커피숍이 즐비한 핫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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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오아시스, 예테보리 정원협회(Trädgårdsföreningen)
스웨덴 명문이라는 예테보리 대학교(Göteborgs Universitet)
예테보리의 상징인 포세이돈상과 예테보리 미술관, 콘서트홀, 시립 극장, 공립 도서관이 있는 예테보리의 예술 문화 중심지, 예타광장(Götaplat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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