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Ⅹ
어릴 적 학교에서 하는 행사 중 유독 박물관 견학을 싫어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밖에 나가서도 공부하라고?! 평범한 어린이들 중에서도 특히나 공부를 싫어했던 어린이였기에 박물관 견학은 매일 해야 하는 학습지만큼이나 싫었다. 그 어린이가 그대로 어른이가 되었고, 물론 여전히 공부도 박물관도 싫어했다. 그런 내가 예테보리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뒤늦게 학구열이 불타오른 거냐고? 놉! 절대! 네버! 설마 그럴 리가... 해는 서쪽에서 떠도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 난 한결같은 남자니까.^^;;
예테보리 살이 보름째가 되니 웬만한 곳은 다 가보게 되었다. 더 이상 새롭게 가볼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겨둔, 아니 남겨 두었다기보다는 한쪽 구석 깊이 처박아둔 박물관 카드를 꺼내게 되었다. 왠지 입장료 본전도 못 뽑고 금방 나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유럽의 박물관은 어떤지 조금, 정말 약간 궁금하기는 하니 가보기로 했다.
구스타프 아돌프 2세 광장에서 운하를 따라 독일교회(Deutschen Christinenkirche)가 있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에메랄드 색 지붕의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이 예테보리 시립 박물관이다. 평소 자주 왔다 갔다 했던 곳인데 그곳이 박물관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티켓 오피스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반가운 미소로 맞아주셨다. 성인 1명당 40크로나.(우리나라 돈으로 약 5300원, 2021년 현재는 60크로나로 올랐다. 약 8000원) 박물관에 자주 다녀보지를 않아 싼 건지 비싼 건지 가늠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충 커피 한잔 값쯤 되는 거 같아 쿨하게 티켓을 구매했다. 아주머니께서 티켓을 건네주시며 꿀팁을 알려주셨다.
“이 티켓으로 여기 있는 총 5개의 박물관을 모두 갈 수 있어요.”
“아, 정말요? 근데 속히 하루에 다 가야 하나요? 추가 요금 같은 건 없나요?”
“아니요~ 유효기간은 1년이에요. 그 안에는 언제든지 갈 수 있어요. 추가 요금 없어요. 이미 이 티켓으로 다 지불한 거예요."
“오~~~ 좋네요! 감사합니다!^^”
일종의 클럽데이 프리패스 티켓 같은 개념인 것 같았다. 유효기간이 1년이라니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1년 안에만 다시 오면 이 티켓으로 관람이 가능한 것이다. 5곳을 모두 가게 되면 가격도 5개 박물관의 입장료가 되니 비싸지 않게 느껴졌다.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짐은 라커에 맡겨두고 안내 책자와 핸드폰만 들고서 관람을 시작했다. 예테보리 시립 박물관은 예테보리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예테보리 최대 박물관이라고 안내 책자에 소개되어 있었다. 언어는 스웨덴어와 영어가 함께 적혀있었다. 먼 과거에서부터 관람이 시작됐다. 서기 700년 경의 유물들이 나왔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신기하게 생겼다. 각 전시품마다 붙어있는 설명들을 꼼꼼히 읽어가며 전시를 관람했다. 다음 전시실에서는 영화 ‘토르(Thor)’로 익숙한 북유럽 신화가 나왔다. 영화의 주인공인 토르는 물론 토르의 아버지 오딘(Odin)과 어머니 프리가(Frigga)까지. 종잇장만큼이나 얇은 지식이었지만 그래도 아는 게 나오니 재밌었다. 뭐지? 이거 실화인가? 내가 지금 박물관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거니?! 괜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유럽 신화로 흥미가 생기자 나머지 이야기들도 궁금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뭐 먹고 살아왔는지, 지금의 예테보리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애초에 대충 휙 둘러보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전시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1층에서 3층, 그리고 다시 1층으로. 결국 예테보리 시립박물관을 완주하고야 말았다.
박물관에 왔을 때가 점심시간이 갓 지난 시간이었는데 나오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어 있었다. 하도 서있었더니 허리도 쑤시고, 발바닥도 아팠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이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집중했었고, 재미있었다. 박물관이 원래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나? 그동안 난 왜 박물관을 싫어했을까? 아무래도 NO관심에서 비롯된 경험의 부재이지 않을까 싶었다. 꼬꼬마 시절부터 좋아하지 않다 보니 어른이가 되어서도 딱히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딱 한 번이라도 가봤더라면 더 일찍 이 재미를 알게 되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아닌 예테보리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글로 된 작품 설명이었다면 하나하나 읽기 귀찮아 대충 흘겨봤을 수도 있는데, 영어다 보니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읽어야 했다. 그래야 겨우 이해를 할 수 있었으니까. 본의 아니게 정독을 하다 보니 내용이 머릿속에 팍팍 꽂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아는 게 생기니 보이는 게 많아졌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 덕에 30년 만에 박물관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박물관 프리패스 티켓은 원래 떠나기 전 협력사 스웨덴 직원에게 주고 가려고 했다. 나머지 4곳의 박물관에 갈 일 있으면 가시라고. 아무리 세상일 모른다지만 1년 안에 내가 다시 예테보리에 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다 쓰는 걸로. 아직 예테보리 살이 5일이 남았으니 1일 1박물관 하면 모두 다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난 정말 1일 1박물관을 찍었다. 스웨덴 유일의 디자인, 패션, 장식예술 박물관인 레슈카 박물관(Röhsska Museet)을 시작으로 예테보리 최대의 미술관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예테보리 미술관(Götenburgs Konstmuseum), 400년에 달하는 스웨덴 해양사를 둘러볼 수 있는 해양사 박물관(Sjöfartsmuseet Akvariet), 예테보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자연사 박물관(Göteborgs Naturhistoriska Museum)까지. 이로써 예테보리 5대 박물관을 모두 섭렵했다. 역시, 박물관은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