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상한 달리기

누가 바르샤바 별로래? - Episode Ⅰ

by 트래볼러

호스텔 근처 카페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뽀개고 바르샤바 구시가지로 향했다. 도시 to 도시로 이동하는 게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뚜벅이를 선호하는데 휴일인 만큼 남들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자는 차원에서 이번에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일요일 아침의 바르샤바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아침 햇살만 있다 뿐이지 새벽 서너시에 나와 있는 것 같이 거리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차 없는 거리이면서 사람 없는 거리였다. 아침의 상쾌함이 아닌 쓸쓸함을 만끽하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으로 사람과 마주쳤다. 한 폴란드 청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버스 노선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정독하고 있는데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는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버스가 오지 않을 거야. 다른 정류장으로 가봐."

"왜?"

"하프 마라톤 대회가 있거든. 이 길이 마라톤 코스야."

어쩐지 아침부터 거리 분위기가 유난히도 쌔~하다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서 기다려?"

"구경하려고. 혹시 시간 되면 너도 구경해봐! 재미있을 거야."


살면서 손에 땀을 쥐며 본 마라톤 경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라톤 레전드의 레전드인(레전드가 이봉주라면 그보다 선배이니)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그 대회. 나한테는 이 정도 급이라 해도 볼까 말까 한 게 마라톤인지라 일개 도시에서 열리는 하프 마라톤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버스가 안 온다 하니 이만 내 갈 길 가려는데,


“헤이! 이제 온다!”


멀리서 마라톤 행렬의 선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 숨어 있다 나타났는지 버스정류장으로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1등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까 싶어 잠시 발을 멈췄다. 뭐지 저 사람들은? 얼핏 보면 흔히 아는 마라톤 대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평범한 러너들 사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러너들이 있었다. 초겨울 날씨임에도 상의 탈의를 하고 뛰는가 하면, 레깅스 위에 드레스나 치마를 덧입고 뛰는 러너들도 있었다. 이 정도는 애교였다. 그 뒤로는 코스튬 행렬이 이어졌다. 죄수번호 4713의 탈옥수들, 배트맨 가면을 쓴 배트우먼(캣우먼이 있는데 왜 굳이 배트맨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체만 헐크, 슈퍼맨 아닌 슈퍼우먼(마찬가지로 원더우먼이 있는데...)까지 DC(DC Comics)와 마블(Marvle)을 넘나드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함께 달렸다. 여기까지도 양반이었다. 적어도 이들은 사람이었으니까. 사람이 아닌 동물, 심지어 과일도 달렸다. 냥냥이와 댕댕이가 사람들 틈 사이 두 다리로 직립 러닝을 했고, 어쩌다 여기까지 휩쓸려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펭수 친구도 있었다. 땀에 절었는지 쭈글쭈글해진 바나나는 뛸 때마다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이 요상한 마라톤의 대미는 기사단이 장식했다. 금색 투구와 방패, 창을 들고 전진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 ‘300: 제국의 부활(300: Rise of an Empire, 2014)’에 나오는 전사들 같았다.(개중 몇몇은 몸이 정말 300 이었다. 멸치인 나는 그저 개부럽;;;)


기사단이 다 지나가고 나머지 후미 러너들까지, 결국 난 마라톤을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이런 마라톤은 못 봤다. 이것은 마라톤이었나? 코스튬 패션쇼였나? 질문에 대한 답은 하루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호스텔에서 얻을 수 있었다. 프런트에서 일하는 안나에게 아침에 보았던 마라톤 썰을 풀었다. 당연히 패션쇼는 아니고 마라톤인데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이름하여 바르샤바 마라톤(Maraton Warszawski) 이었다. 수도의 이름이 땋! 들어가는 것부터가 벌써 메인급 행사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매년 열리는 큰 마라톤을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니 이 정도면 나란 여행자는 꽤나 운이 좋구나 싶어 괜스레 양쪽 어깨에 뽕이 솟았다. 내 궁금증은 이제 다 풀렸으니 이만 방으로 들어가 보려는데 자국 문화행사에 관심을 가지고 재밌어하는 외국인에게 더 많은 걸 알려주고 싶었는지 안나가 날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하... 피곤하다 1절만 하자...)


"폴란드 사람들은 달리기 좋아해. 폴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 중 하나야."


휴일을 활동적으로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폴란드 사람들이다 보니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공원에서 달리기를 많이들 한다고 한다. 폴란드에서는 달리기가 일종의 국민 스포츠인 셈이다. 내게도 달리기를 권했다. 햇살 좋은 날 와지엔키 공원(Łazienki Królewskie) 한 바퀴 돌고 오면 그렇게 좋다면서. 하지만 어떤 운동이든 복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하는 편이다 보니(꼭 운동 못하는 애들이 장비만 찾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할 수 없었다. 이제 알았으니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땐 러닝화 한 켤레와 트레이닝 복, 아니 한복 한 벌 맞춰오련다. 한 손에는 태극기 휘날리며, 구호는 대한독립만세~! 독립운동 코스튬이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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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원주민 복장?과 진짜 꽃이 달린 꽃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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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냥이와 댕댕이, 그리고 남극에서 온 펭수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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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체만 헐크, 배트걸과 호피걸, 그리고 슈퍼걸과 땡땡이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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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번호 4713 죄수 삼형제
마라톤 행렬의 후위를 맡은 왕궁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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