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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1일

누가 바르샤바 별로래? - Episode Ⅴ

by 트래볼러

여행을 하기 전에 여행을 가는 나라나 도시 이름으로 영화를 검색해보곤 한다. 그러면 그곳의 역사를 다루었다거나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검색된다. 개중에 관심이 가는 영화를 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화 속 역사에 관련된 현장이나 배경지는 자연스럽게 여행지 리스트에 추가된다. 블로그나 SNS에 찾을 수 있는 식상한 추천 여행지를 피하고 싶을 때, 여행지를 찾는 나만의 방법이다.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전날 골라둔 영화 한 편을 봤다. ‘바르샤바 1944(Warsaw 44, 2014년)’라는 폴란드 영화였다. 1944년 여름, 나치 치하에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Powstanie Warszawskie)‘를 주제로 한, 실화 바탕의 블록버스터다.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되기 위해 폴란드 국내 군(반나치 저항군)이 일으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 결과는 아쉽게도 나치 독일의 승리로 끝이 났고 바르샤바는 사람이, 아니 그 어떤 생명체조차 살 수 없을 것만 같이 폐허가 돼버렸다. 영화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영화를 보면서 슬픔, 감동, 분노가 교차했는데 마지막에는 멘붕이 왔다. 마무리가 병맛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르샤바 봉기라는 역사를 수박 겉핥기로나마 배우기에는 충분한 영화였다.(갑분 영화 평론?)

영화를 봤으니 영화 속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건 나에게 당연한 수순. 그런데 난 이미 그 역사의 현장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면 바르샤바 전체가 바르샤바 봉기의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폐허가 되었던 바르샤바를 장작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 국민들이 힘을 모았다. 그 결과 그때 그 시절과 같은 지금의 바르샤바로 복원시켰다.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재건된 유적지 중 이처럼 완벽하게 재건된 경우는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사례라고 하니, 과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될 만하다.(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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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곳이 (출처 : 다음 영화 '바르샤바 1944'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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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바르샤바 봉기를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으로 향했다. 여유로운 관람을 위해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여유 있게 보기는 글렀음을 직감했다. 단체로 견학 온 학생들로 이미 입장부터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총 대신 인내를 장착하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바글바글한 학생들 틈 사이에 끼어 몰아치는 파도에 떠밀리듯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박물관 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관람 경로가 화살표로 안내되어 있었지만 화살표대로 따라가다가는 제대로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화살표 따위는 무시하고 일단 사람이 적은 곳부터 골라 다녔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실제와 같이 시뮬레이션해놓은 시청각 형태의 전시가 많았다. 버튼을 누르면 움직이거나 소리가 나오는 등 오감을 자극했다. 날아다니는 포탄 소리와 총소리에 마치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현장에 서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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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입구, 이른 아침부터 관람객들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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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공중전화 부스와 폴란드 군 초소인 척 하는 독일군 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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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남자가 벽에 기대고 있는 이유는? 바로 구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구멍에서 당시 거리의 총소리, 포탄소리가 들려 마치 전쟁통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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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폐허가 된 거리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 무거운 맨홀 뚜껑이 뒹굴러 다니고 곳곳에 포탄도 떨어져 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MIASTO RUIN(폐허의 도시)'이라는 제목의 3D 영상 상영관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1인칭 시점에서 폐허가 된 바르샤바 상공을 비행하는 영상을 보는 것인데,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잿빛으로 변한 도시 위를 날아다니고 있으니 소름이 돋았다. 운석 충돌로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멸종해 멸망하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참담했다.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었지만 상영을 마치고 나온 후에도 쉽게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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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로 만든 폐허가된 바르샤바, 한 문명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년 8월 1일 오후 5시(바르샤바 봉기를 개시한 날짜와 시간) 면 바르샤바에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이때 바르샤바는 1분간 모든 것이 정지된다. 폴란드가 바르샤바 봉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법이다. 문득 폴란드와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 있는 과거와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선 현재까지,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새삼 애국심이 뿜뿜 솟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독립기념관에 다시 가보련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뒤편, 로고를 보면 P와 W가 겹쳐 있는데 W는 바르샤바를 의미하고 P는 반란(Powstania)을 의미한다
박물관 외부 울타리 쪽에 야외 갤러리가 있는데, 바르샤바 봉기를 주제로 한 웹툰 벽화와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촬영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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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형식으로 그려낸 벽화, (좌)바르샤바 여전사들 (też walczyliśmy -우리도 싸웠다!), (우)원숭이로 나치 독일을 희화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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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한 전시 상황의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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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폴란드 국내군, 어린 소녀의 미소가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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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봉기군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벽과 벽 앞 명부에는 사람들이 이름을 찾기 쉽도록 이름의 위치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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