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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제일 먹고 싶은 것

언제쯤이면 먹을 수 있을까?

by 트래볼러
장거리 비행에서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는 기내식이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고 사진 찍는 재미도 있다.
안 먹은 지 오래됐더니 급 당긴다.


내 생애 첫 기내식

처음 기내식을 먹어보게 된 건 생애 첫 번째 유럽인 스웨덴 예테보리로 가는 비행기에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유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대략 11시간. 태어나 처음 해보는 장거리 비행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밥‘이었다. 평소 기초대사가 활발한 터라 오전 10시면 배가 고프고(점심), 오후 4시면 또 배가 고플 만큼(저녁), 항상 배고픔을 달고 사는지라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과연 이 배고픔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지 관건이었다. 블로그에서 사진으로만 봐온 기내식에 대한 내 이미지는 부실한 인스턴트 음식이었다. 11시간 동안 총 2번의 식사를 준다고 되어 있었는데 과연 맛은 있을까? 배는 충분히 찰까? 하는 의문에 의문이 쌓이다 결국 의심에 이르렀다.

기내식을 향한 의심은 이륙한 지 3시간 만에 풀렸다. 메뉴는 단출하게 2가지. 한식과 양식. 자타 공인 육식동물이자 양식 마니아인 난 당연히 포크 앤 나이프를 선택했다. 주문이 끝나자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기내식이 배달됐다. 그리고 마침내 내게도 기내식이 도착했다. 좌석 테이블 사이즈에 딱 맞는 네모난 도시락 같았다. 작지만 그 안에 메인, 사이드, 디저트, 음료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아마도 내가 메뉴를 잘 못 본 듯하다.) 고기는 없고 온통 야채 파티였지만 다 먹고 나니 제법 배가 불렀다. 균형 잡힌 한 끼를 정찬으로 먹은 기분이었다. 인스턴트의 향이 1도 안 느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본 인스턴트 중(군대에서 먹은 전투식량 포함) 가장 품격 있는 인스턴트였다고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내 생애 첫 기내식, 고기는 어딨니?ㅠㅜ


마시다 지쳐 잠들 지어니...

첫 식사 후 포만감에 취해 풀풀 자고 있는데 솔솔 코를 찌르는 맛있는 냄새에 눈을 뜨게 됐다. 바로 간식타임! 간식으로 네모난 조각 피자가 나왔다. 이름하여 ‘피콜로 피자‘. 깊이 잠들어 있었더라면 하마터면 못 먹을 뻔했다. 다행히 뇌는 쉬고 있어도 코는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어떤 음료를 원하냐는 질문에는 당연 맥주! 하늘 꼭대기에서 즐기는 피맥이었다. 피자를 다 먹고 나니 맥주가 어중간하게 남았다. 안주 없이 깡맥주 마셔야 하나 싶은 찰나, 누군가 믹스 너트를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맥주와 와인, 그리고 믹스너트는 무한리필이라는 것. 그동안은 LCC 항공사의 단거리 노선만 이용해 본 터라 메인 항공사 장거리 노선에서 이런 서비스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대머리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은 일단 접어두고 맥주 1캔 더, 믹스너트도 1봉 더, 거기에 와인 1병까지 더 시켰다. 그러고는 마시다 지쳐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다.(주의!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입니다.)

몇 시간 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환한 빛에 눈이 떠졌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싶었는데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고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착륙 전 마지막 기내식이었다. 이번에는 한식을 택했다. 종일 쌀을 못 먹었더니 밥이 당겼다. 게다가 알코올 타임에 몰아 마신 맥주와 와인이 뒤섞이면서 뒷골이 어지러웠다. 해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식 메뉴에 얼큰한 국물 없어 해장은 별이 7개인 사이다로 대신했다. 저녁 식사 후 서서히 정신이 차려질 때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간식으로 나온 피맥.JPG
쌀이 먹고 싶었던 저녁.JPG
간식으로 나왔던 피맥과 믹스너트, 쌀이 먹고 싶었던 저녁은 한식으로, 역시 한국사람은 밥심이다


나만의 소소한 여행 컬렉션

첫 장거리 비행 이후 비행기에서 나오는 모든 먹을 것들을 찍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나만의 여행 컬렉션이 되었다. 남들은 보통 여행지의 마그넷이나 머그컵 등을 모으곤 하는데 나에겐 기내식 사진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신기해서 찍었던 기내식 사진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단순 음식 사진이 아니었다. 여행을 갈 때의 설렘과 돌아올 때의 아쉬움이 사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떠난 어떤 여행이었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가 기내식 사진 한 컷에 모두 담겨 있었다.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나의 여행 컬렉션은 현재 잠시 멈춤 상태다. 요즘 들어 가장 먹고 싶은 건 제철 음식도, 미슐랭 셰프의 근사한 요리도 아닌 기내식이다. 아! 일부 항공사에서 기내식 배달 상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집에서 편하게 먹는 것과 하늘 위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창밖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먹는 것과 같을 쏘냐!? 어림도 없다. 맛도 감성도 천지차이다. 언제쯤이면 이처럼 완벽한 기내식을 즐길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올해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전망이 대세인 것 같다. 그러니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눈으로 먹는 수밖에...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정말 맛없었던 간식 (@스웨덴 출장, 루프트한자 Lufth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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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인천으로 (@스웨덴 출장, 아시아나항공 ASIANA AIR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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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빈 출장, 터키항공 Turkish Air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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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인천으로 (@빈 출장, 터키항공 Turkish Air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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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식사 후 맥주 앤 믹스너트까지 (@이탈리아 여행, 대한항공 Korean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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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에서 인천으로 (@이탈리아 여행, 대한항공 Korean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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