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여행자의 대자연 휴양 여행 - Episode Ⅰ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각,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기 전 4명의 원정대원들과 먼저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필리핀에 오자마자 이게 웬 생이별인고 하니, 사실 이번 필리핀 원정대는 필리핀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는 일로코스(Ilocos)와 필리핀 최후의 비경이라는 팔라완(Palawan) 두 지역으로 원정대원 4명씩 한 팀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팀별로 여행기자님이 한 명씩 붙었다. 난 팔라완팀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일로코스팀과 일정이 달랐다. 우리 팔라완팀은 숙소에 짐을 푼 지 2시간 만에 다시 마닐라를 떠나야 했다. 사실상 우리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마닐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팔라완 중부 항구도시,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에 도착했다. 드디어 여정 끝! 여행 시작! 인가 싶었는데 공항 밖에서 미니버스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 아닌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여정은 끝난 게 아니었다.
“엘 니도(El Nido)까지는 이 버스 타고 육로로 5시간 정도 더 가야 해요.”
뭣이라!? 다다다...다섯 시간!? 그것도 땅으로!? 승차감 제로인 이 미니버스 타고!? 순간적으로 던진 3개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Yes. 우리의 진짜 여정은 정말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이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이렇게까지 고생길을 자처하며 가야 한단 말인가?! 여행 출발 전 원정대원들에게 나누어준 필리핀 관광청 자료에 따르면 엘 니도는 팔라완 북부지역에 위치한 지자체로 트립어드바이저와 CNN이 아시아 최고의 비치로 선정했을 만큼 청정자연 그대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다이빙과 스노클링 같은 액티비티를 즐기기에 최적의 스폿. 세부(Cebu), 보라카이(Boracay), 보홀(Bohol)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이빙 좀 해봤다는 다이버들에게는 성지로 꼽힌다고.(한 일본인 다이버가 다이빙하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비극적인 사연이 숨겨진 섬도 있었다. 고인의 이름 딴 섬의 이름은 시미주 아일랜드, Simizu Island)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조그만 글씨를 계속 읽고 있자니 눈이 아파왔다. 자료는 잠시 내려놓고 창문을 내다보니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얼마를 더 가야 하려나... 시계를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끝을 알고 있어야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힐끔 시계를 봤다. 푸에르토 프린세사 공항을 출발한 지 이제 고작 2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시간은 3시간. 끝을 알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은 취소다. 아직 반도 못 왔다는 절망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고 갑자기 몸도 쑤셔왔다. 그렇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질끈 눈을 감았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엘 니도에 도착한 것이다. 사실 오는 내내 버스에서만 있지는 않았다. 중간에 밥도 먹고 쉴 겸 이곳저곳 들렀다. 순수 이동 시간만 5시간이었지 거의 7시간이 걸렸다. 명절도 아닌데 민족 대이동을 겪은 것 같이 진이 다 빠졌다.
“(질질 캐리어를 끌며) 혹시 저기가 숙소인가요?”
“저긴 휴게실이고 저희는 여기서 배 타고 라겐 아일랜드(Lagen Island)로 한 번 더 들어갈 거예요.”
WHAT?!(나도 모르게 영어가 튀어나왔다.) 어째 거짓말에 계속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어디선가 사기꾼의 향기가ㅡㅡ^)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배가 금방 도착했다는 것. 본의 아니게 자꾸 거짓말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제 정말! 마지막 여정을 위해 방카(Bangka)*에 몸을 실었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흔들흔들, 강한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달린 지 40여 분 만에(이것도 그리 짧은 여정은 아니었다..;;;) 멀리 라겐 아일랜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말 구석진 곳에 있었다. 세모 뾰족한 회색 지붕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게 꼭 원주민 마을 같았다. 초록 잎이 무성한 숲과 높은 기암절벽이 뒤에서 마을을 감싸듯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대륙이 있다면 아마 이곳이 아닐는지. 다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이 정도로 오기 힘들다면야 정말 사람의 손을 탈 일이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날 것의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말일 테니, 과연 어떤 자연이 우리를 맞아줄지 기대가 됐다. 그리고 지겹도록 끝나지 않던 인생 역대 최장거리 여정은 이제 정말 정말 정말 끝이 났다.
*방카(Bangka) : 양쪽에 중심을 잡아주는 날개가 있는 필리핀 전통배, 보통 다이빙이나 호핑투어 때 이용되는 보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