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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

도시 여행자의 대자연 휴양 여행 - Episode Ⅱ

by 트래볼러

보통 여행을 가면 충분히 밤을 즐기면서 더 이상 눈꺼풀이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자곤 하는데, 역대급 최장거리 여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일찍 잘 준비를 마쳤다. 이대로 여행 첫날을 마무리하는 게 아쉬웠지만 다음 날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대(여행)를 위해 소(술)를 포기하는 전략적 일보 후퇴였다.

샤워를 마친 후 불을 끄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이제 고작 밤 10시. 한창 먹고 마실 시간인데... 자꾸만 아쉬움이 남았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안 자고 싶어 혹시나 잠에 못 들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피곤해서 졸리기는 한데 잠 못 드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고문이 또 없으니까.(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다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그저 눈 한 번 깜! 빡! 했을 뿐인데 깜깜했던 방이 바로 환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뭐지? 잔거 맞나? 혹시 잔 게 꿈은 아니었나 싶을 만큼 너무 찰나였다. 더구나 자고 일어났다는 개운함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이 천근만근이지는 않은 걸 보면 또 자기는 한 것 같았다. 살짝 열어둔 열어둔 창문 커튼 사이로 엘 니도의 아침햇살이 들어왔다. 적막하면서도 환한 게 뒹굴뒹굴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걷어찬 이불을 다시 감쌌다.


부스럭~ 부스럭~


방안은 내 발가락 꼼지락거림에 맞춰 이불 부시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부스럭~ 부스럭~


어라? 뭐지? 이번엔 발가락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잠시 후 또다시,


부스럭~ 부스럭~


처음에는 밖에서 나는 소리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겠거니 싶어 그냥 넘겼는데 그다음 소리가 났을 땐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방 안에서 나는 소리라는걸. 일어나서 확인해봐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몸이 생각처럼 바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창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터라 귀차니즘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기도 했고, 의문의 소리에 대한 실체를 가늠할 수 없어 살짝 무섭기도 했다. 일단 머리 위 핸드폰을 챙겼다. 그리고 방어 용도로 쓸만한 무기 같은 물건이 없나 찾았다. 침대 주변에는 마시다 남은 생수통뿐이었다. 일단 그거라도 집어 들었다. 침대에 내려와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 딱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화장실 쪽을 둘러보러 한발자국 내딛는데 갑자기 파다다닥!


“으아아악~~~!”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침대로 올라갔다. 그 와중에 얼핏 녀석의 실루엣을 봤다. 작지만 날쌘 기다란 생명체. 다리는 4개, 꼬리도 있었다. 실루엣을 보고 나니 더 무서웠다. 뭔진 모르겠으나 너무 민첩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을 묶어야 하는 방이었기에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 어떻게든 놈을 쫓아내야 했다. 다시 2차전 돌입. 일단 놈의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춘 곳으로 다가갔다. 자세는 최대한 낮게, 물통을 몽둥이 삼아 앞세워 슬금슬금. 그러자 순간 또 파다다닥! 하며 이번엔 쓰레기통이 쓰러졌다.


“아아아악~~~!”


앞세운 몽둥이가 뻘쭘하게 어느새 난 다시 침대 위에 있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쓰러진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보였다. 물통 주둥이를 이용해 넘어진 쓰레기통을 일으켜 세웠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쓰레기통 안을 살폈다. 드디어 놈을 제대로 보게 됐다. 놈의 정체는 도마뱀. 얼핏 봤던 실루엣과 정확히 일치했다. 녀석은 쓰레기통 안에 있는 초코과자 봉지에 남은 초코를 먹고 있는 건지 내가 위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도 꼼짝하지를 않았다. 막상 제대로 보니 내 중지 손가락 길이만 한 게 제법 귀여웠다. 원래는 녀석을 발견하는 즉시 때려눕혀 기절시킬 생각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그러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사실 녀석이 너무 빨라 그렇게 하지도 못했겠지만.) 난 녀석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쓰레기통 뚜껑을 빠르게 꽉 닫고 문밖으로 들고 나왔다. 그렇게 녀석을 밖에 풀어 주었다. 녀석은 내 방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쏜살같은 움직임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녀석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끝까지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해피엔딩!^^

내 방의 침입자 도마뱀, 자세히 보아야 귀엽다
알고 보니 라겐 아일랜드에서 이런 친구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침 먹으러 식당 가는 길에
아침부터 혀 날름거리면서 어디 가냐? 너도 아침 먹으러 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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