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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Jan 05. 2022

삶의 적정 온도

남해 팸투어 - EpisodeⅡ

남해의 노을을 보러 가기 전, 시간이 어중간해 수제맥주 브루어리를 들르게 됐다. 수입맥주의 가세로 종류도 다양해지고 국산 수제맥주들이 잇따라 젊은 층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그야말로 맥주는 요즘 대세 주류 중에서도 가장 힙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인기에 걸맞게 번화가나 감성 맞은 아기자기한 골목길(흔히 리단길이나 카페거리 같은)에서 힙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거 웬걸? 지도 앱에 주소를 찍고서 찾아가는 내내 진짜 이 주소가 맞는 건가? 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하필 내가 길잡이를 했다;;;) 의문이 끊이지 않을 만큼 너무도 한적한 시골마을을 걷고 있었다. 당장에 소가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도 어색하지 않은 표현 그대로 촌스러운 마을. 이런 마을에 정말 수제맥주 브루어리가 있었다. 이름은 사우스 밸리. 간판은 입구 앞 나무 우체통 아래에 붙은 『F2019』가 전부라(가게 이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주소를 찍고 가지 않았다면 분명 논밭길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남해관광문화재단을 통해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계셨던 사장님께서 인기척을 느끼시고는 문 밖으로 마중을 나와주셨다. 사장님의 반가운 인사와 함께 브루어리 안으로 들어갔다.


"네?! 여기는 그럼 펍은 아닌가요?"


에헤이~ 남해관광문화재단과 팸투어 주최 측 간에 주파수가 잘 맞지 않았다. 우리는 수제맥주 체험은 물론 맥주를 마시며 놀멍쉬멍 할 수 있는 펍 같은 공간으로 알고 왔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펍은 쏙 빠진 순수 수제맥주 체험과 클래스를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즉, 수제맥주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 하... 공부라... 아무리 좋아하는 맥주지만 '공부'라는 단어가 붙는다면 더 이상 좋아할 수만은 없다. 살짝쿵 당황하고 어이없어하는 주최 측과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생각하고 열심히 걸어온 나를 비롯한 여행작가분들은 하나같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도 없는 노릇. 사장님께서도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괜스레 미안하셨는지 짧게 영상자료라도 보고 가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셨다. 특별히 인당 한 모금씩 맛이라도 볼 수 있게 수제맥주를 무료로 제공해주시겠단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곧 빔프로젝터를 통해 영상이 출력됐고 모두들 언제 풀이 죽어있었냐는 듯 총명한 눈빛으로 영상을 시청했다.

이십여분 남짓 되는 영상은 사우스 밸리 소개와 이곳에서 실제 재배하고 있는 맥주의 원료인 홉(HOP)과 맥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상이 끝난 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음 타임! 사장님께서 직접 주전자에 담긴 싱싱한(?) 수제맥주를 따라 주셨다. 또르르... 근데 정말 한 모금만큼만.^^;; 조금만 더 달라 슬쩍 잔을 들이 대볼까 했지만 잔들고 기다리는 손들이 너무 많아 양심상, 아니 무언의 압박상 그럴 수 없었다. 기계 같은 정량 배식을 마치고선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누르스름한 조명 빛이 더해져 일반 맥주보다는 찐한 갈색을 뗬다. 보리차 물보다는 결명자 물 같은 색깔이라고나 할까? 색깔처럼 맛도 더 찐했다. 처음 혀에 닿을 때부터 홉의 풍미가 느껴졌고 꿀꺽 삼킨 후에도 풍미가 입안 전체와 목구멍까지 남아있었다. 그 와중에 청량감도 놓치지 않았다. 캬아~~~ 인생맥주 갱신이다.


시음을 하면서 사장님의 맥주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름 맥주를 좋아해 맥알못(맥주를 알지 못하는)은 아니라 자부하고 있었건만 사장님의 이야기는 온통 신세계였다. 듣는 내내 아하! 를 연발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맥주의 온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거의 모든) 맥주를 차게 마시는 경향이 있다. '맥주=시원함, 청량감' 이기에 가능한 차게, 얼기 바로 직전 수준까지 차게 해서 마시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왜 냉동실에 얼려둔 글라스 잔에 나오는 눈꽃 맥주도 있지 않은가? 사장님 말씀에 따르면 굉장히 맛있게 잘 마시고 있는 거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잔에 담긴 맥주가 라거(Lager) 일 때의 경우이고 에일맥주인 경우에는 좋은 맥주를 맛없게 먹고 있는 거라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기업 맥주들은 거의 라거이기에 차게 마시는 것이 맞지만 에일맥주는 청량감보다는 홉의 향을 느껴야 하기에 알맞은 적정온도가 있었다. 보통 집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냈을 때, 5~7분 정도 상온에 방치해둔 후에 마시면 시원하면서도 홉의 향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을 거라 하셨다. 그동안 냉장고에서 꺼내 바로 마셨던 수많은 에일맥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 캬아~~~ 맛있다고 마셨었는데. 맥주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아는 척한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맥주 때문이라고 치자!라고 하기엔 너무 한 모금.^^;;)


사장님께서 주신 수제맥주가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살짝 높다더니, 고작 한 모금에 취한 걸까? 불현듯 우리의 삶에도 '적정 온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열의가 없이 살아도 안되지만 너무 열의가 넘쳐도 문제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사는 게 가장 맛있는 삶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약간 열의 넘치게, 높은 온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건 많은데 상대적으로 시간은 없다 보니 최대한 텐션을 올려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면 성취감도 느끼고 기분은 좋지만 종종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ㅠㅜ 조금은 온도를 낮추고 편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하지만 내가 나를 너무 잘 알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난 루즈해지면 한없이 루즈해지는 성격인지라...^^;; 그래서 난 오늘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살짝 높은 온도에 있다. 어쩌면 나에겐 이게 가장 맛있는 삶의 적정온도일지도.

사우스밸리 입구
사우스밸리 내부 공간, 그리고 바
갬성잇는 의자와 테이블, 에펠탑 보며 한잔 하고 싶다
바의 누르스름한 감성 조명이 수제맥주의 색과 잘 어울렸다


< TRAVEL NOTE >


사우스밸리(Southvalley)

맥주의 주요 재료인 홉(hop)을 국내산으로 생산하는 수제맥주 공방. 센테니얼(Centennial) 홉(hops)과 크래프트비어(craftbeer) 홈브루잉(homebrewing)을 원-데이 클래스(one-day class)로 체험할 수 있다.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남해대로 688번길 30
※주차가능

[영업시간] 매일 9AM-22PM

[문의] 0507 1346 0139

참조 : 다음/위키백과, 카카오맵, 남해군 관광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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