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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May 18. 2022

감 떨어진 여행작가의 엉망진창 제주행

제주도 가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드르륵, 드르륵.

묵직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김포공항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 이 얼마만의 공항철도인가! 조금 수고롭기는 해도 난 공항 갈 때 주로 공항철도를 이용한다. 출근러들이 대부분인 아침 시간에 홀로 캐리어를 끌고 다니노라면 (살짝 민폐라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어깨도 으쓱! 물론 요즘 시대에 여행 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마는 그래도 괜히 기부니가 좋아진다.

가는 길에 역사 내 전신 거울이 보이면 인증숏을 꼭 찍는다. 안 그래도 멸치인 내 몸을 좁쌀 멸치로 만들어주는 무식하게 큰 배낭에, 카메라 가방을 앞으로 메고, 한 손에는 캐리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모습이다. 여행 가는 모습. 이 모습을 박제하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여행의 시작을 알리면서 텐션을 높이는 일종의 여행 전 세리머니 같은 것이다. 일 겸 여행 겸으로 오랜만에 제주도에 가게 된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최애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행복은 딱 공항철도까지. 공항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사전엔 절대!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났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 당황의 연속이었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나만의 경건한(?) 의식

아니, 뭐지 이거? 남들 다 출근할 때 나만 혼자 놀러 가는 줄 알고 신나 있었는데 체크인 대기줄은 가드레일 밖으로 삐져나와 줄줄이 소시지였고, 셀프 체크인 역시 빈 곳 없이 열일 중이었다. 이 정도 줄이면 최소 30분, 길면 1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할 것만 같았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기다리는 시간 때문이 아니었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난 두세 시간도 기다릴 자신이 있었지만 내 티켓은 15분 후 출발.(아아악~! 정말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급하게 항공사 직원을 찾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급은 했으나 당황은 하지 않았다. 2년 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었으니까.

한라산 당일치기 산행을 가는 날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거의 임박해 수화물 검색대에 도착했고 직원에게 시간이 없다 사정을 이야기를 하니 앞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 먼저 검색대를 통과했다. 그리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순간 공항 전체로 익숙한 이름이 울려 퍼졌다.


"탑승객을 찾습니다. 7시 40분, 제주로 출발하는 XX항공 유의민 고객님께서는 지금 즉시 6번 게이트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


나는 손을 번쩍 들은 채 저예요~~~!!! 를 외치며 달렸고 간발의 차로 6번 게이트에 도착해 터치다운에 성공했더랬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심장 쫄깃한 탑승이 되겠구나 싶었다. 별수 있나? 내가 늦게 온 걸. 자, 마음의 준비 완료! 직원에게 다가가 티켓을 보여주며 급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어...  7시 15분 비행기는 탑승이 끝났어요."

"예?  그래도 비행기 이륙까지 아직 15분이나 남았는걸요..."

"음... 잠시만요. 한 번 더 확인해볼게요."

에이~ 설마 아니겠지. 뭔가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나 같은 (진상) 고객을 위한 플랜 B가 메뉴얼에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직원은 더 단호박이 되어있었다.


"죄송하지만 늦으셨어요. 이미 수화물 접수도 끝나서... 다른 방법이 없네요."


늦은 건 나지만 이상하게 화가 났다. 아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은 사람을 위한 예외적인 메뉴얼도 없는 건가?(물론 난 피치 못할 사정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전에도 1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분명 탈 수 있었는데ㅡㅡ^ 난 목구멍 밖으로 솟구치려는 용암 같은 화를 억누르고 가능한 차분하게 2년 전 터치다운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며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지 한 번 더 물었다. 아니 제발 찾아달라 부탁했다.


"죄송한데 저희 창구에서 가장 빠른 다음 비행기로 다시 예매하시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뭬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ㅡㅡ^ 억눌렀던 화를 끝내는 분출 하며 따지... 려고 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내 잘못이라 더 이상 부탁을 할 수도, 떼를 쓸 수도 없었다.

항공사 직원이 유유히 자기 자리로 떠나고 난 한 동안 얼빠진 상태로 덩그러니 공항 한복판에 서있었다. 비행기를 놓친 에피소드를 들어본 적은 있으나 내가 그러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분명 비행기 시간 10분 전에도 충분히 탔었던 거 같은데. 국내선은 거의 지하철처럼 딱 시간 맞춰 와도 탈 수 있지 않았었나? 내 기억이 왜곡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난 실시간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남긴 SNS 댓글을 확인했다. 다들 짜고 치기라도 한 듯 아무리 국내선이라도 더 일찍 왔었어야 한다며 늦게 온 내 잘못이란다. 하... 하도 오랫동안 비행기를 안 탔더니 감이 떨어졌나 보다. 그제야 눈앞에 닥친 현실이 받아들여졌다. 아놔... 내가 비행기를 놓치다니...


비행기 시간을 변경하기 위해 XX항공 부스로 갔다. 여기도 줄이다. 다들 참 부지런도 하다. 이 아침에 어딜 가도 줄이라니. 엿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앞사람도 비행기 시간을 변경하고 있었다. 나와 동지인 듯했다. 볼일 다 보고 돌아서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설마, 오늘 비행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 내 차례가 왔다.


"가장 빠른 다음 비행기로 해주세요. 비용은 상관없어요."

"네, 지금 제일 빠른 건... 오후..."


아... 망했다. 한두 시간 뒤도 아니고 아예 오후라니. 추가 비용도 아깝고 아침 일찍부터 예약해 놓은 렌터카도 아깝지만 무엇보다 여유를 포기하고 나온 나의 아침과 제주에 일찍이 도착해 계획한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게 가장 싫었다. 싫어도 별 수 없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선뜻 오케이를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요? 하시겠어요?"


정녕 이 방법뿐이란 말인가?! 그때,


"일단 이걸로 해두시고 대기표 나누어 드릴게요."

"대기표요!?"


난생처음 비행기를 놓쳐봤으니 대기표라는 것도 처음 들어봤을 수밖에. 말 그대로 대기표, 대기순서다. 뭘 대기하느냐? 매 비행기 시간마다 빈자리가 생기면 채워 넣어주는 것. 대기표 순번에 따라 채워지게 된다. 빈자리가 생길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갈 수 있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시간 변경 후 대기표를 받았다. 대기번호 11번. 현재 다음 타자는 6번. 즉, 내 앞에 5명 대기가 있다는 얘기. 이게 많은 편인지 적은 편인지 감이 안 잡혔지만 일단 희망을 안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무교지만 부처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 님, 알라신, 하나님까지 신이란 신은 모두 불러내며 기도를 했다. 누군가 한분은 들어주시겠지.


"대기번호 6번, OOO 고객님!"


오! 한 명이 구제를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7번, 8번까지. 이제 내 앞에는 단 2명. 이 기세를 몰아 단숨에 나까지? 는 아쉽게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줄기 빛을 봤다. 아침 시간이라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되는 듯했다. 어느덧 내 뒤로도 대기번호가 제법 늘어난 걸 보면. 이 페이스면 다음은 나까지 구제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뒤로 갈수록 공석이 잘 안 생겼다. 그치, 시간이 늦을수록 늦을 확률은 낮을 테니.


연속 2타임이나 공석이 없어 아무도 구제되지 못했다. 초조해지는 걸 넘어서 살짝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짐이나 맡겨놓고 김포 아웃렛 쇼핑이나 다녀올까 싶은 찰나, 오랜만에 호출 알림이 울렸다. 그것도 2명이나. 됐다. 이제 다음은 나다. 바로 나올까 아니면 다음 타임일까 조마조마하게 기대를 하며 기다리는데,


"대기번호 11번 유의민 고객님."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출발시간은 8시 55분.  됐다! 오후에 갈 뻔했는데 이 정도면 선방이다. 분명 비행기를 놓쳐 1시간 40분 늦게 출발하게 되었는데도 희한하게 기분이 좋았다.


발권하고 짐도 부쳤으니 이제 남은 건 신분 확인과 보안검색대. 본래 바이오 등록 후 하이패스처럼 지나갈 계획이었으나(꿈도 참 컸다^^;;) 바이오 등록부터 해야 해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일반 고객 라인에 줄을 섰다. 줄은 길었지만 다행히 금세 빠졌다. 신분 이상무! 이제 보안 검색대만 남았다. 이건 껌이지 뭐.(후훗) 몸에 걸치고, 메고 있는 모든 걸 바구니에 내려놓고 주머니를 털었다. 삐빅! 당연히 통과!인 줄 알았는데 검색대 직원이 내 가방을 가져오며 날 불러 세웠다.


"고객님 가방에서 칼이랑 가위가 있는  같은데요. 기내 반입 금지 품목이라 빼셔야 됩니다."


아, 필통을 통째로 가방에 넣었구나;; 칼, 가위는 빼놨어야 하는데. 진짜 감 떨어졌네 짐도 제대로 못 챙기고ㅠㅜ 별거 아니긴 하지만 일 때문에 필요한 물건이라 (진상인 줄 알면서도) 난 한번 슬쩍 들이대 보았다.


"저기, 일 때문에 필요한데 정말 모르고 넣었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정 필요하시면 아래 사무실 가셔서 관련 서류 작성하시고..."

"아, 아니에요. 그럼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그렇게까지... 그냥 기분 좋게(?) 기부하는 걸로 아름답게 마무으리.

눈누난나~♪ 비행기 놓쳤어도 막상 비행기 타니 기분 좋아짐^^

다사다난했던 김포공항에서의 2시간이었다. 어쨌든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짐을 올리고 자리에 앉아 이제는 편하게 숨좀 돌려야지 하고 있는데 승무원이 다가왔다. 뭐지? 뭐가 또 잘못됐나?(아직까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고객님, 일단 이 안내서 읽어주시고요, 고객님께서 앉아계신 자리는 비상구 좌석으로..."


그랬다. 어쩐지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게 편하다 싶었는데 비상구 좌석이었다. 편안함을 얻은 대신 비상시 승무원들을 도와 승객들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정말 이번 제주행은 평범한 게 하나도  없구나ㅠ^(웃픈 표정) 당연히 무사 비행하겠지만 특히나 더 아무 일 없기를, 다시 세상 모든 신들을 소환해야겠다.

비상구좌석, 편하긴 한데 승무원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떴다 떴다 비행기~♬
오랜만에 비행 인증!
얼른 와라 버스야~
드디어 제주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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