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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Dec 23. 2022

저기요, 유람선이라면서요...

두 효놈의 부산 효도여행 - Episode Ⅲ

서서히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었다. 물론 당장 나갈 수 있는 모든 준비는 마친 상태로. 다 준비해놓고 안 나가는, 아니 못 나가고 있는 이유는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 비가 오는 바람에 계획을 변경할지 아니면 일단 그냥 계획대로 움직여볼지 결정하지 못했다. 엄마가 카페, 쇼핑, 전시회 같은 실내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 보니 비 오는 날 엄마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지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고민만 하다가(실상은 고민하는 척 멘붕상태로 있다가)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웠고 시간에 의한 강제 추방을 당한 후에야 떠밀려 결정을 하게 됐다.


"그냥 계획대로 갑시다. 태종대로."


태종대는 엄마의 픽이었다. 나와 동생이 안 가봤다 하니 30년 전 가본 엄마는 또 가도 된다며 우리에게 태종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난 이왕이면 엄마가 안 가본 곳을 가길 원했으나 사실 30년 전이면 처음 가보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싶어 마지못해하는 척하며 동의했다.

30년 전 엄마의 기억 속(어쩌면 이제 반은 상상일지도 모를) 태종대는 해안절벽 아래까지 내려가 사진을 찍었던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검색해 본 지금의 태종대는 깔끔한 전망대가 있어 태종대와 바다 뷰를 감상하고 사진도 찍는 포토스폿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 찍는 곳인 건 여전했다. 그때 그 시절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태종대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다누비열차라는 일종의 셔틀 같은 귀염뽀짝 열차가 있어 아기자기한 재미와 함께 편하게 태종대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것. 근데 여기서 또 날씨가 문제였다. 비 오는 날에는 노면이 미끄러워 열차 운행을 안 한단다. 하는 수 없이 태종대 전망대까지 우산 쓰고 우중산책을 즐길 생각으로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주차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아저씨 2명이 말을 걸어왔다. 이것은 필시 호객행위. 비가 와 다비누열차는 운행을 안 하고 걸어서 태종대까지 가려면 대충 1시간 좀 넘게 걸린다며 마치 걸어서는 절대 못 갈 곳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지도앱으로 총 2.1km 거리에 도보로 약 32분 소요된다는 걸 찾아봤기에 나에게는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 대신 다른 이야기가 솔깃했다. 본래 태종대라는 건 태종대 전망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침식으로 깎여진 기암괴석의 해안절벽이라고. 그래서 전망대에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둘러봐야 제대로 보는 거라고. 평소의 나였다면 어떤 호객행위든 단 1초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무시하는 편인데 그래도 여행 좀 다녀봤다는 (불효)놈으로서 엄마와 동생에게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것과 비로 인해 다소 차질이 생긴 일정을 대체할 만한 플랜 B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려 몇 분이나 계속된 장황한 설명을 귀 담아 듣고, 곱씹어 생각한 끝에 그대로 호객행위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3장 주세요!"  


평소 잘 쓰지도 않는 비상용 현금을 지갑에서 꺼내 흔쾌히 거래를 성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요즘 뜨는 트렌디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막상 유람선을 탈 생각을 하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디 태종대가 얼마나 멋진가 한번 볼까나?


만족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안'이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선착장까지 데려다주는 셔틀버스에 실려왔다. 12인승 셔틀버스인데 딸랑 우리 가족 3명뿐이었다. 약간(아니, 매우) 불안했다. 거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후회스러웠다. 역시 낚인 건가? 하지만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긴 대기줄을 보고서는 우리만 낚인 건 아닌 것 같아(어쩌면 낚인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희망과 함께) 조금은 안심이 됐다. 싶었는데 곧 다시 또 불안이 밀려왔다. 이유인즉슨, 출렁이는 파도의 리듬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유람선 때문. 아니, 그보다는 유람선이 유람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누가 봐도 그냥 고깃배였다. 저게 유람선이라고? 그럼 어릴 적 내가 한강에서 탔던 유람선은 뭐지? 유람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유람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유람선의 사전적 의미라도 찾아보려 N사전에 접속하는 찰나 내 두 다리는 어느새 갑판 위였다. 괜찮은 거겠지? 그래,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텅 비어있어서 미친 듯이 흔들렸던 걸 거야. 그렇게 위로를 하며 일단 바깥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탑승이 끝나고 바로 출항했다. 출항과 함께 선장님의 웰컴 멘트가 이어졌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약 40분 정도가 소요될 거란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배에 오른 지 5분도 채 안돼 이미 멀미를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 뒤돌아 엄마와 동생을 살피자 마찬가지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우리에게 40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배는 선착장을 떠났기에 돌아갈 수는 없고 그저 40분이 4분처럼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뱃멀미는 우리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접어들자 파도는 더 심하게 변덕을 부렸고 배안에 선장님 빼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죽상이었다. 시끌벅적 큰 소리로 떠들어대던 아저씨 아줌마들도 말이 없어졌다. 배의 엔진 소리, 파도치는 소리만 들릴뿐. 태종대 앞에서 선장님의 가이드와 미리 녹음되어 있는 가이드 방송이 나왔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제발 그만~ 그만 돌아갑시다. 마음속에서 외치고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마침내 회항!  약 10분 뒤면 선착장에 도착한단다. 이제껏 잘 버텼으니 10분만 더 버티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풀려있던 마음을 굳게 다졌다.


"엄마 조금만 참아! 금방 도착할거야~"


내 코가 석자였지만 유독 안색이 안 좋아진 엄마를 격려하며, 나와 동생, 엄마, 우리 세 가족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부디 아무 일 없이 도착하기만을 기도했다.(참고로 우리 집은 무교다.) 나이롱 신도들이지만 기도가 하도 간절해서 들어주신 건지 우리는 무사히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딱 선착장까지만 이었다. 배에서 내려 육지를 딛자마자 엄마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류현상에 몸을 맡겨버렸다.


"엄마! 괜찮아!? 저기로 저기로~"


바로 뒤에 있던 난 엄마가 걱정돼 등을 두들겨주면서도 뒤이어 이 길을 지나갈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 엄마를 구석으로 몰았다.(하필 또 일찍 내린다고 제일 앞에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어우 힘들어. 그래도 살 것 같다."


엄마는 기력은 빠져 보였으나 기분은 좋아 보였다. 배 안에서 안 한 게 어디냐며,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이렇게까지 긍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 불찰은 맞는 것 같아 엄마한테 미안했다. 불효놈이 또 한 건했다ㅠㅜ 엄마가 좋아하든 말든 비도 오는데 그냥 카페 가서 달콤한 디저트나 먹으며 살이나 뒤룩뒤룩 찌울걸. 아니 그나저나, 내 판단 미스이긴 하다만 다시 생각해봐도 저게 어째 유람선인가?! 호객을 하더라도 사기는 치지 말아야지!!! 생각하니 빡쳐 유람선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했다.

유람선 : 구경하는 손님을 태우고 다니는 배 (출처 : 네이버 사전)

젠장.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저 말이 딱 들어맞았다. 내가 알고 있던(그리고 원했던) 크루즈 스타일의 여객선은 말 그대로 선박의 종류 중 하나이지 그 자체가 유람선을 지칭하는 건 아니었다. 하... 화풀이할 핑곗거리 마저 사라지니 또 열이 오른다. 앞으로 다시는 비 오는 날 배는 타지 않으리라. 설사 파도가 강물처럼 잔잔한 맑디 맑은 날 타더라도 어떤 배인지 보고 타련다. 아니, 그냥 이제 배는 안탈란다.

선착장이 있는 태종대 자갈마당으로 내려가는 길 | 저 배가 바로 문제의 유람선
이 날씨에 굳이 배를 탔어야 했냐?! 이 불효놈아!


참조 : 다음/위키백과, 카카오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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