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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Apr 27. 2023

트립어드바이저에 낚였다

제주에서 차박 여행 - EP Ⅳ

일상에서는 천상 ISTJ지만 여행 중에는 ISTJ이길 철저히 거부한다. 여행이란 꼭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거나 결과가 있어야만 하는 목표가 아니기에 ISTJ의 특기인 책임과 의무를 굳이 다하려 애쓰지 않는다. 계획도 마찬가지. 평소 집요하다 싶을 만큼 꼼꼼히 계획하는 일상과는 달리 태평하다 싶을 만큼 사이사이 이가 빠져있는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을 한다.(대충 어디를 갈 것인가 정도만 정해두는 편) 빠져있는 이들은 여행하면서 그때그때 채우고 싶은 것들로 채운다. 그렇기에 내가 추구하는 여행이자 가장 좋아하는 여행은 무계획 즉흥여행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단 가급적 두 발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정거장이나 목적지 없이 그때그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까. 천천히 다니면 자세히 오래 볼 수 있다는 장점은 덤이다.


제주 차박 여행에서의 유일한 계획은 말 그대로 '차박'을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에라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뭐든 하게 되겠지. 금능에서 차박을, 협재에서 차크닉을 마치고 아침으로 해장해물라면 한 사바리 때린 후 혀에 맴도는 맵고 짭짤한 나트륨을 중화시키기 위해 오설록 티 뮤지엄에 갔다. 리뉴얼 중이라 뮤지엄은 볼 수 없었지만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몇 년에 걸쳐 봐야 할 양의 녹차잎을 한두 시간 동안 다 봤다.(향후 몇 년 동안 이제 녹차는 안녕~~~) 자, 그럼 이제 다음은 어디로 떠돌아 볼까? 아무 생각 없는 동생과 아무 계획 없는 나는 출구 없는 고민에 빠졌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 스케줄 상 조금 이른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일러도 너무 이른 것 같아 한두 군데 정도는 찍고 가자는 데만 의견을 맞췄다. 좋아, 그럼 일단 제주공항 방향으로 출발! 가다 보면 뭐가 나오겠지. 창을 열고 곧 다가올 겨울의 냉기가 살짝 느껴지는 쌀쌀한 가을바람과 아직은 여름의 잔열이 남아있는 가을 햇살을 맞으며 가을 제주 드라이브를 즐겼다. 도로사정에 민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서행하며 제주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다 내 시야에 들어온 현수막 하나.

트립어드바이저 트래블러스 초이스 수상
세계관광객이 뽑은 제주도 명소


오! 트립어드바이저라면 제법 공신력 있는 여행 웹사이트가 아닌가?! 게다가 글로벌하기까지 한 곳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저기 가보자!"


동생에게 이야기함과 동시에 핸들을 꺾었다. 그런데 넓디넓은 주차장이 텅~ 비어있는 게 왠지 느낌이 쎄~했다. 뭐 내가 사람들이 적은 시간에 올 수도 있는 것이니 일단 그러려니 넘어갔다. 주차 후 횡단보도를 건너 입구로 가려는데 횡단보도 앞 벽에 관람방법이 붙어 있었다.

관람방법
생각하는 정원을 그냥 보고 가면 1/10을 얻어가는 것이고 글까지 읽고 가면 7/10을, 생각을 품어가면 열을 다 얻어갈 것이다. - 시인 김미영 -

2차 쎄~함이 몰려왔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1/10만 얻어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냥 돌아갈까 살짝 고민했지만 이왕 주차까지 한 거 일단 입구까지 가보기로 했다. 매표소 앞에 서자 직원이 환영인사와 함께 생각하는 정원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블라블라~ 어쩌고 저쩌고, 앞에 말은 다 안 들리고 마지막에 꼭대기층 카페에 올라가면 날씨 좋은 날엔 한라산까지 보인다는 말만 귀에 꽂혔다. 뭐 그것만 제대로 보고 와도 본전은 뽑는 거겠다 싶어 티켓을 구매하려는데 가격을 보고는 지갑을 열던 손이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성인 12,000원. 예상하기로 정원 한 바퀴 슥~ 구경하고 루프탑에서 커피 한잔 하며 풍경 보는 게 전부 일거 같은데 가격이 내 기준에 가성비와 가심비를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시 마가 뜬 사이, 이렇게 재고 따지고 고민할 거면 왜 계획 없이 즉흥여행을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런 게 즉흥여행의 묘미지. 일단 고!

띠링~♬ 24,000원이 결제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하아...

관람을 시작한 지 5분이 채 안 돼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아니야, 가면 뭐가 더 나오겠지. 무려 트립어드바이저 픽인데 이게 다 일리 없어! 라며 계속해서 스스로 합리화 겸 희망고문을 해보았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주차장이 텅 비어있는 이유가 있었다. 앞에 '생각하는'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기는 했지만 정원이라고 해서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정원들을 기대했다. 봄이 아닌지라 화사하진 않아도 가을에 어울리는 꽃들이 가을빛을 뽐내고 있을 줄 알았건만 꽃보다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땅이 뿌리를 박은 큰 나무들이 아닌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귀요미 나무들. 모두 옮겨 심은 분재였다. 사람들의 기증을 통해 꾸며진 정원. 그랬다, 정원의 또 다른 이름은 분재원이었다. 각 분재마다 설명과 함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마 입구에서 본 글을 말하는 것이리라. 저걸 다 읽어야 7/10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생각을 해야 전부 얻어가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동생에게는 그저 하얀 건 바탕이요 까만 건 글씨일 뿐.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읽어보려 했으나 도저히 눈에도 머릿속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색은 우리 형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글도 안 보고 생각도 안 하려니 정말 빠르게 정원을 돌았다.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정원도 아니다 보니 사진을 찍을만한 포인트도 딱히 없었고 무엇보다 우리의 의욕이 바닥이었다. 그냥 얼른 한 바퀴 돌고 이 지루한 곳을 빠져나갔으면.

생각하는 정원 입구와 관람 방법이라기보단 경고장
야자수와 분재, 돌하르방이 어우러져 제법 제주스러운 기분은 느낄 수 있다
정원으로 내려가는 길
야자수와 분재들이 은근 잘 어울리기는 한걸 보면 나름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정원임에는 틀림없다
그냥 딱! 제주

아무 생각도 의욕도 없이 좀비처럼 걸으며 가까스로 카페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메뉴판은 스킵하고 늘 마시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하려는데 이곳은 주인장께서 세계 3대 커피를 소개해주셨다. 나는 그래도 조금은 아는데 동생은 완전 커알못. 초딩입맛이라 커피맛을 전혀 모른다. 소귀에 경읽기나 다름없는 세계 3대 커피 속성 교육 이수 후 결국 고른 건 아메리카노. 그래도 나름 예멘 모카다. 그런데, 주문을 하려는 찰나 창밖으로 보이는 뷰가 잿빛이었다. 당연히 한라산은 보일리 만무했다. 순간 동생과 마주친 눈. 서로에게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커피는 됐고 그냥 갈까? 어차피 한라산도 안 보이는데.'

뜻이 통한 걸 확인한 우린 그렇게 기약 없는 다음에 올게요~라는 미련을 남기고 카페에서 나왔다.

카페에서 나온 후 급 흐려진 날씨;;; 역시 제주 날씨란...
야자수 언덕에서 바라본 생각하는 정원 전경

정원이고 뭐고, 한라산뷰에 커피 한 잔이고 뭐고, 패스! 패스! 패스! 그냥 다 패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정문으로 원점회귀했다. 드. 디. 어. 이 지루한 여정이 끝난 것은 반가웠으나 정원 한 바퀴 도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단 20분 만에 24,000원이 훠이~훠이~ 날아갔다. 우리가 얻은 것은? 그나마도 어렵사리 건진 풍경사진 몇 장. 십 분의 일 잘 얻고 갑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지나고 나면 뭐든 다 추억이 되고, 추억이 되면 웃을 수 있다지만 왠지 여행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도 웃을 수 없는 추억(흑역사라 쓰려다 그래도 추억이라 적어본다.)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출구 앞 폭포에서 갑분 다시 맑아진 날씨 (오락가락 하는 게 꼭 날씨가 내 기분과 같았다)

불과 20분 전까지만 해도 입구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 옆 출구를 빠져나오며 매표소 직원분과 눈이 마주쳤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쟤네 왜 이렇게 빨리 나와?'

내 알빠야 쓰레빠야 하고 쿨~하게 넘기고 싶었지만 괜히 민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트립어드바이저 현수막이 보였다.

아C, 트립어드바이저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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