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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Sep 07. 2017

생각 정리 여행, 통영 대매물도

살다보면 가끔 필요한 여행

이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없는 곳을 좋아하기 시작한 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슬럼프라는 맨홀에 빠진 나를 스스로 구출시켜보고자 찾은 통영.

처음 해보는 혼자 여행으로 신나고 재밌게, 때로는 여유롭게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지쳐있는 심신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다. 이제 금방 맨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득 그 이후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맨홀을 빠져나온 이 후, 어렵사리 꽉 채운 삶의 에너지를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에 소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예전과 같은 일상이라 함은 출근-야근-퇴근-집을 일주일 동안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또다시 일상에 지쳐 맨홀에 빠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무한루프처럼 반복될 게 뻔했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을 때는 지금과는 다른 일상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번 여행이 터닝 포인트가 되어 삶의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일상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일'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입사한 회사였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전공 자체도 내가 원한 전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과거에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난 선뜻 답을 낼 수 없었다. 정작 나 자신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먼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행스럽게도 질문에 대한 답은 통영 여행을 통해서 얼추 찾은 것 같았다. 기존에 알고 있던 내 모습과 여행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모습들이 '나'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였다.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보기 중에서 어떤 게 정답일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어떤 것이든 선택 후에 안고 가야 할 책임도 부담스러웠다. 흔히 말하는 멘붕이란 게 이런 상태인 듯했다.

결국 난 평범한 회사원 말고는 다른 길도, 그럴 능력도 없는 걸까?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이제는 내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기 직전까지 도달했다.


내 자존감만은 지키기 위해 부정적인 생각들은 털어내고 복잡한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에게 당장 필요한 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과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다행스럽게도 통영은 나에게 그 기회를 주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통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다를 가로질러 직선거리 27km 떨어진 그곳에 혼자가 되기에는 더없이 좋은 통영의 외로운 섬, 대매물도가 있었다.




아직 거리의 불빛이 채 꺼지지도 않은 이른 새벽, 다른 사람들이 깰까 조심스레 일어나 겉옷만 걸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한여름인 8월이지만 해가 없는 새벽은 살짝 선선할 것 같아 얇은 겉옷을 걸쳤는데 바닷가 근처의 습한 기후 때문인지 팔에 닿는 옷의 촉감이 영 답답했다. 몇 걸음 걷자마자 결국 겉옷은 짐으로 전락했다.


일어나자마자 눈곱도 안 떼고 가벼운 짐(?) 하나 챙겨 나와 향한 곳은 통영 여객선 터미널.

대매물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티켓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블로그를 통해 대매물도로 가는 법을 검색해본 결과 성수기철에 배편을 구하려면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깰 만큼 부지런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이유인즉슨, 통영에서 갈 수 있는 근처의 대표적인 섬으로 매물도와 비진도가 있는데(이 외에도 연화도, 한산도, 욕지도 등도 있다.)  그중 매물도는 소매물도와 대매물도로 나뉜다. 특히 소매물도가 인기 있는 관광지인데 오래전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기도 하고, 물떼 시간(*썰물 때 수심이 낮은 곳이 드러나 소매물도와 그 옆의 등대섬을 왕래할 수 있는 시간)을 잘 맞추면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장관과 등대섬을 둘러볼 수 있어 통영 여행의 필수코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여객선 운항이 섬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진도, 대매물도, 소매물도를 경유하는 식으로 하여 한 여객선으로 운항되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대매물도를 가더라도 소매물도와 비진도에 가는 관광객들과 배편이 겹쳤다. (대매물도는 흔히 그냥 매물도라고 통칭되기도 하니 티켓 예매나 구매 시 확인하기 바란다.) 또한 8월처럼 무더운 한여름에는 조금이라도 덜 더운 시간대에 몰려 그 시간대의 티켓은 빨리 매진이 된다고 했다. 때문에 블로그 신봉자인 난 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 터미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졸린 걸음으로 터덜터덜, 터미널 앞에 도착했을 때 허탈한 마음에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길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대기 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터미널 입구 앞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혹 내 시계가 잘못되었나 싶어 재차 시간을 확인해봤지만 정확히 오픈 전 30분. 이른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30분을 기다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난 결국 1번이자 끝번 대기자로 대매물도행 배편을 구했다. 내가 너무 설레발을 친건지 블로그의 정보가 잘못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덕분에 가장 좋은 시간대의 배편을 구한 것으로 만족했다. 허탈함과 만족감이 교차하는 상태로 또다시 터덜터덜 걸어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와 못다 잔 잠을 청했다.




잤는지 안 잤는지 헷갈릴 만큼 어설픈 잠에서 깨어 오늘의 두 번째 아침을 맞이했다. 어째 새벽보다 더 피곤했다. 간밤에 악몽을 꾸었던 것처럼 새벽의 허탈함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꿈나라에 있어 조용히 씻고 짐을 챙겼다. 로비로 내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하는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다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은 배를 타려는 사람들과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제야 티켓박스에 줄이 조금 보였다. 하지만 새벽부터 나와서 대기해야 할 만큼 긴 줄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빼앗긴 새벽잠에 대한 분노가 치고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분노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티켓을 보고서야 가라앉았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시간대의 티켓을 얻었고 지금 저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배가 있니 없니 물어보며 원하는 티켓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속도로 하이패스를 통과하듯 거침없이 터미널을 통과했다.


배는 이미 시동을 켜고 출발 전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매쾌한 매연의 향기가 콧속을 찔렀다. 상쾌한 아침 공기 사이에 있어 그런지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처럼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배는 1층과 2층, 복층으로 되어 있었다. 앉아서 가기 위해 실내인 1층으로 들어갔다. 지정된 좌석이 있지는 않아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하지만 앉은 지 1분도 채 안되어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웅웅 거리는 배 소리와 향긋한 매연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뱃멀미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한 느낌에 실외인 2층으로 올라갔다.


다들 나와 같은 이유였을까? 2층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역시 배를 타면 바다 바람을 쐐주는 게 정석인 것 같다. 해가 막 떠오른 아침이라 그런지 햇살이 유난히 강했다. 그늘이 내려앉은 곳은 사람들로 이미 만원. 어쩔 수 없이 태양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렇게 자리를 잡자 드디어 배가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침의 해는 동쪽에 있는 법. 배가 출발과 동시에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다. 태양과 정면대결을 해야 했던 내 자리가 그늘이 되었다. 순간 그늘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 다른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2층 갑판은 출근시간 지옥철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냥 그대로 가는 수밖에...


나의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배가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늘이었다가 양지였다가를 반복했다. 반복되는 태양 고문에 벌써 지치는 듯했다. 이럴 바엔 그냥 바다 바람과 풍경을 즐기며 가는 게 낫겠다 싶어 배의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며 바다를 구경을 했다. 덥기는 해도 그늘을 포기하니 편해졌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더위와의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어느새 첫 번째 경유지인 비진도에 도착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제 막 비진도에 가려는 사람들과 이미 구경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고 올라탔다. 개 중에는 비진도 주민들도 있는 듯 보였다.

비진도를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리는 사람이 더 많았음에도 배의 인원은 크게 줄지 않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매물도에서 내리지 않을까 예상이 됐다.


곧이어 다음 경유지인 소매물도 도착했다. 안내방송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그 와중에 여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의 목적지는 대매물도였으니까. 나처럼 여유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워낙 정신없이 하선 준비를 하는 바람에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다 내리고 남는 사람은 대매물도 가는 사람이겠지 하는데 이게 웬걸! 소매물도 하선이 완료되고 배에 남은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1층 실내로 내려가 봐도 선원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왕래하는 대매물도 주민들 조자도...

1층에 있는 선원 아저씨들이 오히려 나에게 왜 안내렸나며 물었다. 난 대매물도를 간다고 하고 다음이 대매물도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왠지 남들 다 내리는데 혼자 남으니 잘못 탄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다행히 다음 목적지는 이 배의 종점인 대매물도란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가서 난 대매물도에 도착했다. 혼자 덩그러니... 이상하게 섬에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대매물도에는 당금 마을과 대항마을이라는 2개의 마을이 있었다. 내가 내린 곳은 당금 마을에 있는 당금 선착장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초입에 당금 마을이라고 적힌 비석이 날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당금 마을은 붉은색과 살색의 지붕을 가진 정감 있는 집들이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셀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었다. 분위기는 아주 조용, 아니 고요했다.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활기찬 내 발자국 소리와 사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였다. 혹시나 내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대매물도의 분위기를 때는 잡음이 될까 싶어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디뎠다.


대매물도는 소매물도처럼 바다가 갈라진다거나 예쁜 등대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다른 말로 특별히 유명한 게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사람들이 대매물도가 아닌 소매물도를 찾는 이유가 있다.) 굳이 유명한 걸 하나 꼽자면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중 5구간인 매물도 해품길이라고 해서 트레킹 코스가 하나 있었다.(한려해상 바다백리길은 총 6개의 구간이 있고 주변 섬인 미륵도, 한산도, 비진도, 연대도, 소매물도에 있다.) 아주 높지는 않지만 장군봉(해발 210m)이 이 곳의 정상이었다. 난 대매물도의 정상인 장군봉을 찍고 대항마을 쪽으로 내려와 다시 당금 선착장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분명 주민들이 살고 있는 섬인데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한창이라 땅과 공기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시간 때인 것도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가 나를 조금 외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듣던 대로 혼자 생각 정리하기에는 정말 최적의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이번 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복잡하게 꼬였던 모든 것들을 이 곳에서 모두 풀고 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호기롭게 장군봉으로 향했다.


좁다란 마을 길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니 어느덧 마을은 내 뒤편에 있었다. 내 뒤로 당금 마을과 바다의 풍경이 짝을 이뤄 섬마을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한 것도 잠시, 이제부터가 진짜 등산이었다. 내 앞으로는 푸르른 초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쉼 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초원의 풀들은 힘없이 한 방향으로 쓰러져있었다. 누워있는 풀들을 헤치고 중턱까지 오르니 이정표가 보였다. 장군봉까지 2.6km. 정확하게 어느 정도 거리인지 체감되지는 않지만 섬안에서 멀면 얼마나 멀겠냐 싶어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정표를 따라가니 장군봉으로 향하는 매물도 해품길이 나왔다. 바다 해(海) 자를 써서 '바다를 품은 길'이라는 뜻의 해품길은 정직했다. 이름 그대로 걷는 내내 바다가 보였다. 다른 말로, 울창한 숲은커녕 나무 한그루 없이 시야가 탁 트여 있다는 말이고, 고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탁 트인 전경에 가슴은 시원했지만 정확하게 내 정수리를 비추는 햇빛에 몸은 뜨거웠다. 어쩌면 해품길의 진짜 뜻은 바다 해가 아닌 태양을 뜻하는 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했을까...

장군봉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조금씩 급해졌다. 일반적인 등산코스로 치면 급한 경사는 아닌데 아주 열정적이신 해님 덕분에 급경사에 험한 산을 오르는 체험을 하게 됐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축~ 늘어진 옷처럼 내 몸도 축~ 늘어졌다. 기어가듯 늘어진 몸을 이끌고 오르던 중 사막에 오아시스 같은 정자가 나왔다. 잠시 쉬어갈 겸 정자에 앉았다. 아니 벌러덩 누웠다. 공기와 바람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햇빛이라도 가려지니 한결 살 것 같았다.


살짝 더위가 가시고 나니 축축한 찝찝함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땀냄새가 나고 안 나고는 둘째치고 옷이 너무 젖어 육지에선 입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가방에서 어제 입었던 옷을 꺼냈다. 빨지 않아 냄새가 좀 나기는 했어도 뽀송뽀송했다. 순간 주변을 둘러봤다. 올라오는 내내, 그리고 섬에 들어온 이래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난 과감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상하의 모두, 속옷까지.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대매물도의 자연 속에서 진짜 자연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TV에 나오는 산속에 사는 자연인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장군봉을 향해 가려는데 정자 그늘 밖을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갔다가 내려오면 다시 빨랫감이 되어있을 옷도 걱정이 됐다. 이제는 재활용하여 입을 옷도 더 이상 없었다. 이렇게 장군봉을 포기해야 하나 싶은데 갑자기 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


생각정리.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보고자 찾은 대매물도였다. 애초에 장군봉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대매물도의 해품길 정상이 장군봉이었을 뿐이고, 정상까지 가면서 차분하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매물도의 자연에 빠져, 그리고 더위에 지쳐 아무 생각 없이 오르기만 했다. 이제야 이 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으니 지금부터라도 계획대로 내 머릿속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어떤 것부터 정리해야 할까?...

막상 생각을 정리하려니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낙서장처럼 지저분했던 머릿속이 새로 산 노트처럼 깨끗해진 것 같았다. 고생해서 올라왔건만 허탈함에 배가 고플 지경이었다. 억지로 떠올리려 애써봤자 소용없음을 알기에 일단 눈 앞의 불 먼저 끄기로 했다. 장군봉까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예상했던 결과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은 아주 말끔히 해결이 되었으니 소정의 성과는 이뤘다치고 이쯤에서 이만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내려가면서 오늘의 다음 일정과 여행을 마친 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통영 가서 씻고, 밥 먹고, 서울로 올라가면 여행 끝,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출근, 그리고...'




대매물도를 다녀온 이후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생각이라는 건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인위적,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때 저절로 마음속에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생각이 많아 잠들지 못할 때.

가끔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럴 때면 아마 난 또다시 대매물도를 찾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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