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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Jun 14. 2018

우리가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서대문형무소

만약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이제야 찾아가는 게 왠지 미안하다.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이름하에 새롭게 태어난 이래로 이제 년수로 10년이다. 10년 동안 난 왜 이곳에 올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부끄럽게도 관심의 문제였다.

1년 전, 나는 폴란드 여행을 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인권이나 민족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야 알았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끔찍한 곳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 후 반드시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서울에 있으니 언제든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 베트남 하노이로 떠나게 되었고, 그곳에는 호아로 수용소(19세기 말 프랑스 식민 정부가 항불 투쟁을 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던 장소)가 있었다. 물론 다녀왔다. 이렇게 바깥으로 돌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안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 먼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진대... 심지어 모 방송에 나왔던 독일 친구들보다도 늦었으니...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서대문형무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서대문형무소로 안내하는 푯말이 있다. 푯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면 길게 늘어선 빨간 담장과 보수공사 중인 망루가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다. 난 착실하게 푯말이 시키는 대로 작은 언덕을 올라 그 옛날 일제에 맞선 애국선열들의 얼과 혼이 깃들어 있는 살아있는 독립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앞에 섰다.


< 서대문형무소 >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사적 제324호로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의병탄압) 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 서대문 감옥 -> 서대문형무소 -> 경성형무소 ->  서울형무소 -> 서울교도소를 거쳐 1967년에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 후에는 반민족 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이후 4.19, 5.16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에 옛 서울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다. 이 가운데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 9~13 옥사, 나병사(癩病舍, 나균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감염병), 사형장 등을 남겨두었다. 1988년부터 공원을 만들기 시작하여 1992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근·현대사의 여러 주요 사건과 연관된 현장으로서 이곳을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성지로 보전하고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승화 발전시키기 위해 1995년 8월부터 옥사와 망루 등 각종 시설물을 보수,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11월 5일, 현재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서 문을 열게 되었다.

※참조: 위키백과


서대문형무소로 가는 길
서대문형무소 앞
입구 오른쪽 담장에 붙어있는 3.1 운동 당시의 태극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정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고 적힌 정문을 옆 작은 쪽문을 지나 형무소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봤을 땐 담장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었는데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부지가 넓고 탁 트여 있다. 물론 실제 감옥으로 쓰였을 당시와 현재 역사관으로서의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은 역사관인만큼 삭막하고 음침한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편안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공원처럼 한적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도 느껴졌다.

저 멀리, 옥사 벽면에 걸려있는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 방송을 통해 한번쯤은 봤을법한 서대문 형무소의 상징이라 할 수 있겠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독일 친구들도 저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더랬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한 외국인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이곳의 의미를 아는지 태극기 앞에서 만세 포즈를 취한다. 보는 눈이 많아서 부끄러웠는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대형 태극기에 이끌린 나머지 관람 루트를 지나쳤다. 보통 서대문형무소 관람은 입구에 있는 보안과 청사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극기 앞에서의 인증숏은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마친 후에 남기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려 보안과 청사로 향했다.


한적한 공원 같기도 한 서대문형무소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대형 태극기
외국 관광객들의 필수코스, 태극기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서대문 형무소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보안과청사)
면에서 보면 회색 시멘트 자국이 있다. 백색타일을 떼어낸 흔적이다. 1959년 중축공사시 백색타일을 붙였다가, 2010년 보수공사 시 백색타일을 제거하고 원형으로 복원되었다.


보안과 청사는 1층 -> 2층 -> 지하 순으로 관람하도록 되어있다. 우선 1층에서 형무소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시작된다. 형무소 역사실에 들어가기 앞서 입구 옆 슬로건에 눈길이 끌린다.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
(1908 ~ 1987)


지금은 100세 시대지만 당시에는 수명이 짧았을 터, 그렇다고 봤을 때 대략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 정말 오래도 걸렸다. 만약 1908년에 태어나 1987년, 80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온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려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불과 31년 전의 일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유년시절과 청춘도 저 안에 녹아있다. 나 역시 저시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났다. 비록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그 시절 이 땅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섬찟 소름이 돋는다.


형무소 역사실 입구 옆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슬로건


형무소 역사실은 정말 형무소에 갇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바로 곳곳에 설치된 철장 때문이다. 정말로 갇혀 있는 것도 아닌데 보는 것만으로 답답하다. 실제로 이 철창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보안과 청사 관람 후에 옥사 관람도 하게 될 텐데 벌써부터 살짝 걱정이 앞선다. 역사실에는 형무소의 외관 구조와 변화 과정, 강압적이었던 일제의 운용실태, 그리고 해방 이후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장소로서 그 모든 실태에 대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다름 아닌 형무소 미니어처다. 건물마다 LED가 달려있고, 미니어처 앞 스크린에서 건물을 클릭하면 건물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해당 건물에는 빛이 들어온다. 역시나 특히 아이들이 좋아라 한다.

형무소 역사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미니어처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기유각서와 *을사늑약문이다. 기유각서는 사법권을, 을사늑약문은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모두 강제로 체결된 문서들이다. 비록 이곳에 있는 건 영인본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리관을 깨부수고 문서를 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물론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 워~ 워~ 컴다운~^^;;)


*기유각서 : 일제가 대한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장악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하였던 문서 (1909.07.13)
*을사늑약문 :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보호국화 시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하였던 문서 (1905.11.17)

※ 독립기념관 소장


형무소 미니어처와 벽면에 붙어있는 구조도
건물을 클릭하면 설명이 나오고 해당 건물에 불이 들어온다
기유각서(己酉覺書-좌)와 경성감옥 명칭 지정 건에 대한 관보(官報-우)
을사늑약(乙巳勒約)문




화를 한모금 잔뜩 가슴에 머금고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역사실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소개하기를 '억압과 공포의 상징'이라 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과 증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다음 전시관인 2층의 민족 저항실이었다. 민족 저항실은 역사의 시간순에 따라 Ⅰ, Ⅱ, Ⅲ로 나뉘어 있는데 대한제국 말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실상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민족 저항실 Ⅰ에서는 우리 민족의 저항이었던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의병장들과 의병들을 기리고,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독립운동에서 활약한 의열단과 항일결사 조직을 비롯해 당시 주요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서는 대뜸 안중근 의사 사진 아래 이름을 손으로 가린다. 그리고는 뒤이어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이분이 누구야?"

"..."

"이분 누군지 몰라?" (제법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음... 알긴 아는데..."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나 싶다. 아무리 그래도 안중근 의사를 모를 수 있다니... 하지만 잠시 후, 다른 사람 비난할 처지가 아니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날 부끄럽게 만든 건 애국지사 160여 명이 체포된 *안악 사건과 이로 인해 다시 600여 명이 체포된 후 끝내 105명이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105인 사건이다.


*안악 사건 : 1910년 11월, 독립운동가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자 일제는 이를 기회로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애국지사들을 동시에 탄압하기 위해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라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로 김구 등 서북 지방의 애국지사 160여 명이 체포되었다.

*105인 사건 : 이때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 회원이 일부 체포되자, 1911년에 신민회를 '총독 암살 사건'의 배후로 조작하여 6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105명의 애국지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참조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부끄럽지만 솔직히 누군가 나에게 이 두 사건에 대해 물어봤다면 '음... 알 것 같은데...'라는 대답조차 못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로 역사를 공부한 적이 없어서? 당시 수능 단골 문제가 아니라서? 다 변명이다. 처음에 말했듯 관심의 문제다. 우리는 정규 교과과정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는 있지만 사실 학창 시절 한 때의 배움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꾸준한 관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한 번 우리 역사에 대한 미안함과 나의 무관심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국사책에서 많이 봤을 그림
순국 의병장과 수많은 의병들(좌), 곽한일(郭漢一) 의병장의 칼(우-상)과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호신용 지팡이(우-하)
문경 의병장 이강년(李康秊) 대한 동태 보고서(좌),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許蔿)의  체포의 건(중),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사형 판결문(우)
아저씨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안중근(安重根), 윤봉길( ), 이봉창 의사와 독립운동, 강제병합에 대한 전시
안악사건과 105사건을 비롯한 의열단, 항일결사 조직에 대한 기록이 전시되어 있는 민족저항실 Ⅰ
의열투쟁과 항일결사 조직
수감자 탈주 방지용 요(허리에 채우는 체인)와 수감자 이송 시 일반인에게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도구
수감자 탈주 방지용 족쇄와 수갑
3.1운동과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목각판
유관순(柳寬順) 열사
3.1운동이 일어난지 약 90일 후, 서대문형무소에 24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분노를 머금고 들어갔던 민족 저항실 Ⅰ에서 부끄러움을 한가득 안고 나왔다. 이어지는 민족 저항실Ⅱ는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자료인 수형기록카드를 전시하여 그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추모의 공간이다. 네모반듯 엽서 크기의 수형기록카드들이 사방으로 도배되어 있다. 마치 욕실 타일 같기도 하다. 이처럼 슬픈 인테리어가 또 있을까? 문득 아우슈비츠에서 보았던 한 할머니가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오셨던 할머니의 눈가는 흐를 듯 말 듯 고여있는 눈물로 촉촉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이 곳 서대문형무소에도 그 할머니처럼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오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층 더 숙연해진다. 한분 한분 일일이 묵념을 드리고 싶었지만 너무나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방 한가운데에서 모든 분들을 위한 묵념으로 대신했다.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가 전시되어 있는 민족저항실 Ⅱ
이 공간의 깊은 의미를 아직은 잘 모를 꼬마 아이들에게는 그저 재미난 방이었을지도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님의 수형기록카드
너무나 많은 분들이 계셔서 누가 누군지 찾기도 힘들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분명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민족 저항실 Ⅲ은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1919.04.13), 제2의 만세운동인 '*6.10 만세운동'(1926.06.10),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조직된 '경성트로이카'(1933년)를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수형기록카드를 조회할 수 있는 검색대가 있어 민족 저항실을 돌아보며 궁금했던 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도 있다.

각 사건들의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그 끝에,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 모형이 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이 곳에서 수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당하고 산화되었던 곳이라 하니 가라앉았던 분노가 치민다. '사형장 가는 길'이라고 쓰인 글씨를 따라 수습실 안으로 들어간다. 동공에 적응이 필요할 정도로 깜깜한 시신 수습실 안, 작은 스크린에서  독립운동가 *강우규 선생님의 절명시 영상이 흘러나온다. 그 뒤로는 이 곳에서 산화되었을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있다.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과연 그분들에게는 쉬운 일이었을까? 물론 선택권이 없는 강제적인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을 것이다. 겉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 굽히지 않는 강한 면모를 보였을지라도 그 안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우규 선생님은 오히려 단두대 위에 서자 봄바람이 감돈다고 하시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상황의 기분이 어떨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나였다면 결코 단두대 위에서 봄바람을 떠올리지는 못했을 것 같다. 강우규 선생님의 애국심과 강한 의지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4줄의 짧은 절명시가 많은 걸 느끼게 한다.


절명시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강우규-


꼬마야~ 누구를 찾고 있니?
수감기록 조회 시스템, 유관순 열사의 수감기록
경성트로이카와 주요인물들
사형장 가는 길을 따라 모형 시신수습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신수습실 안 상영되고 있는 강우규 선생님의 절명시
이곳에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들
시신수습실 출구로 시구문이 이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과 증거들을 살펴봤다면 이제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해서도 안될 끔찍한 참사의 현장을 둘러볼 차례다. 두 계단을 내려가 지하 고문실에 도착했다. 지하라서 공기가 선선한 것인지 이 곳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복도에서부터 음산한 기운이 맴돈다.

최근 민주화 운동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나오면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당시 어떤 고문을 했는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모형으로 재현시켜놓은 것이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니 영화 속 장면으로 볼 때 보다 인상이 찌푸려지고 오금이 저리면서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게 무슨 잘못이겠냐마는 설사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한들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접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각 고문실을 돌아보니 이건 분명 인간 이하, 아니 그 이하로도 취급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분했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어떻게 사람이라는 탈을 쓰고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무자비할 수 있나? 하는 분노가 교차한다. 상식 이하의 일들이 상식으로 만연하는 끔찍한 곳, 서대문형무소 지하 고문실은 그런 곳이었다.


음산함이 감도는 고문실 복도
물고문 - 강제로 물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코나 입에 마구 들이부어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준 방법. 폐에 물이 차 흉막염에 걸려 매우 고통스럽게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취조실 - 재판 전 미결로 수감자들을 일일이 경찰서로 이송 후 취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고등계 형사를 직접 서대문형무소에 파견하여 이곳에서 취조를 하였다
임시구금실 - 취조 전 임시로 잠시 구금하였던 곳,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는 고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비명 소리와 폭언이 들리도록 배치하여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손톱찌르기 고문 -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준 고문 방법. 손톱뿐 아니라 입 속까지 마구 찔르기도 했으며 그 고통으로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상자 고문 -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집어넣어 마구 흔들며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지하독방 - 취조 후 옥사 이동 전 감금장소.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 여기서도 만세를 외치며 독립의 다집을 되새겼다고 한다
벽관 고문 -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 벽에 서 있는 관이라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숨 막히는 지하 고문실을 끝으로 보안과 청사 관람을 마쳤다. 제법 견디기 힘든 관람이었지만 아직 둘러봐야 할 곳이 남았기에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음은 간수 사무소와 옥사가 있는 중앙사 건물이다. 중앙사는 제 10,11 옥사와 연결되어 있어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했던 곳으로 건물 원형 그대로가 보존된 것이라고 한다. 옛 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사무실이 나온다. 간수 한 명이 홀로 책상에 앉아 있다. 사무실 안에는 수감자들의 생활기록과 의식주에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1920년대 원형 그대로의 중앙사 건물, 뒷편의 옥사와 연결되어 있다
홀로 근무 중인 간수, 뭘 봐!
간수사무소 전시실
기결수 의복과 밥을 펐던 틀


간수 사무소는 바로 옥사로 이어진다. '옥사로 가는 길'이라는 그림 속 간수가 마치 나를 안내하는 것 같다. 그를 따라 들어가니 양쪽으로 길게 뻗은 감방 복도가 나오고 그 중심에 간수 감시대가 있다. 그 옆으로는 서신실도 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면서도 서신은 허락이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자체 검열이 있었겠지만...

이제 감방 복도로 향한다. 철장 사이로 각 방들을 빼꼼히 들여다보며 걷는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건이 느껴진다. 이 불쾌한 기분은 대체 뭐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위에서 누군가 삿대질을 하는 검은 그림자가 날 쳐다보고 있다. 다름 아닌 감방을 감시하는 간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모양과 표정을 보니 분명 수감되어 있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디 돌이라도 있으면 던져 주고 싶을 정도로 꼴 보기 싫고 못생겨 보인다.


서신실과 간수 감시대
감방복도, 천장에 누군가 서있다
뭐!? 어쩌라고!? 이걸 확! 마 그냥
일명 먹방(먹물처럼 깜깜한)이라 불린 독방,



옥사를 둘러보는데 음악과 함께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오후 6시. 서대문형무소의 마감시간이다. 아직 공작사, 추모비, 사형장, 여옥사 등 둘러봐야 할 곳이 더 남았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한 나의 판단 미스다. 그냥 훌훌 지나간다면 1시간이 안 걸려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최대한 꼼꼼히 보려 애썼다. 그 결과 옥사 관람을 마지막으로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마쳐야 했다.

출구로 나가는 길, 태극기 앞 인증숏은 포기하는 대신 형무소 안을 빠른 걸음으로 크게 한 바퀴 돌며 사진으로나마 담아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꼭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겠노라 다짐했다. 그때는 꼭! 태극기 앞 인증숏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추모비
출구로 가는 길, 급 썰렁해진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로 오는 길에 한가로운 휴일을 즐기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만약 독립운동가들의 용기와 희생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한가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까? 과연 지금의 우리들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그런 용기와 희생을 발휘할 수 있을까? 새삼 독립운동가들에게 경의가 표해진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지금의 이 자유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피와 땀, 희생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온갖 탄압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을 외친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관람을 끝내고...



< TRAVEL NOTE >


*13도 창의군(倡義軍)
대한제국의 항일의병 조직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났을 때, 각지의 의병부대들을 단일대오로 통수하기 위해 1907년 원주에서 거병한 이은찬(李殷瓚), 이구채(李求采, 혹은 이구재(李九載)) 등이 주도하여 문경의 이인영을 수 일간 설득, 통수로 추대하고, 각 도에서 의병들을 모집하여 한양으로 진격, 일본군을 토벌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한 자발적인 의병 연합부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大韓民國臨時政府)
한민국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의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중국 상해에서 단일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1926년 6월 10일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강우규(姜宇奎)
강우규(姜宇奎, 1855년 4월 20일 ~ 1920년 11월 29일)는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참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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