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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19. 2017

구시가지로 가는 길

세월의 흔적은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

크라쿠프 구시가지(Old Town)로 가는 길.


얀 마테이코 광장에서 1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 몇 걸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그 짧은 거리 사이에 거쳐야 가야 할 관문이 하나 있다. 만약 중세시대에 이 곳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죽었거나 포로로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크라쿠프를 지켜온 그 관문은 유럽 최대의 요새, 바르비칸(Kraków Barbican)이다.


크라쿠프 구시가지로 통하는 관문, 바르비칸(Kraków Barbican)


바르비칸은 15세기인 1498년에 지어진 현존하는 유럽 최대의 원형 요새다. 폴란드에서가 아닌 유럽에서 최대!!! 이제 난 다른 어느 유럽 국가를 가도 이보다 큰 요새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현재는 요새로서가 아닌 박물관으로서 크라쿠프를 지키고 있다. 아쉽게도 동절기에는 내부 관람을 할 수가 없다. 하절기인 4월에서 10월까지만 오픈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금은 3월, 바르비칸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일주일만 지나면 오픈인데...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날씨, 사람도 많지 않은 비성수기라 적당한 시기에 잘 왔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했는데 처음으로 조금만 더 따듯한 날에 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운 마음에 쉽사리 바르비칸을 떠나지 못했다. 혹 누군가 나타나 잠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듯 바르비칸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바르비칸의 간판과 타임 테이블
굳게 닫힌 철창 사이로 들여다본 내부 전경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침공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입었다.(특히 현수도 바르샤바는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다.) 하지만 크라쿠프만은 운이 좋게도 독일군이 주둔해있어 그 영향을 피해갈 수 있었다.(독일군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그 덕분에 크라쿠프는 물론 내 눈앞에 있는 바르비칸도 지금의 깔끔한 상태로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외벽 곳곳에 뚫린 포구
거대한 열쇠구멍 같은 포구


앞으로도 바르비칸이 잘 보존되어 오래도록 이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노후가 되면 노후되는 대로,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안은채 보존이 되어 갔으면 좋겠다. 때로는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보다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고귀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감동이 훨씬 더 크고 깊은 법이니까.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크라쿠프 구시가지 역시 본연의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현존하는 중세시대 폴란드와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꼽히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시가지 전체가 중세시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유지보수 차원에서 군데군데 크고 작은 상처를 치료하기는 하였겠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새로 지어진 건물은 없다고 하니...



바르비칸을 거쳐 플로리안스카 문(St. Florian's Gate) 지나면 크라쿠프 구시가지가 시작된다


바르비칸 바로 앞에는 크라쿠프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플로리안스카 문(St. Florian's Gate)이 있다. 때문에 바르비칸 주변은 유동인구가 많아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멀지 않은 곳에 얀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가 있어서 그런지 유독 내 눈에는 금발의 예쁜 여자들이 눈에 띈다.(미대와 금발에 대한 환상을 가진 한 남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이다.)


예쁜 여자들 사이에서 예쁨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백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다. 크라쿠프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오랜 삶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새햐얀 머리카락,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 주름진 얼굴과 손, 발. 이 흔적들은 일부러 만들어 낼 수 없다. 설령 만든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보다 실화에 더 관심이 가듯,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감동 역시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제 문하나만 지나면 크라쿠프 구시가지다.

과거 중세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크라쿠프 구시가지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로 어떤 감동을 선사해줄지 사뭇 기대가 되는 가운데, 나는 곧 세월의 흔적이 가져다주는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게 될 것이다.


플로리안스카 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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