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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23. 2017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 직물회관

푸근한 전통시장에서의 싸늘한 추억

현존하는 중세 유럽 광장 중 두 번째로 넓기로 소문난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

광장에 들어선 순간 선택 장애가 발동하고 말았다. 내 뇌 속에 선택을 담당하는 영역은 이미 마비 상태. 대체 어디서부터 둘러봐야 하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동시에 다 둘러보고 싶지만 내 몸이 나뉠 수도 없는 노릇. 마음만 조급하다.


머릿속이 계속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이럴 때는 머리라는 놈보다 몸이라는 놈이 더 믿을만하다. 나는 그냥 몸이 원하는 대로, 몸이 이끌리는 대로 가기로 했다. 눈, 코, 입, 귀, 그리고 손과 발까지, 오감을 느낄 수 있는 내 모든 신체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마침내 내 두 다리가 걷기 시작한다.





내 발걸음은 광장 정중앙에 위치한 상아색 건물로 향하고 있다. 고작 2층 정도 되는 낮은 높이지만 광장 한가운데에서 100m의 길이로 쭉 뻗어있는 그 건물은 광장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직물회관, 수키엔니체(Sukiennice)다.


중앙시장 광장(Rynek Główny)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한 직물회관, 수키엔니체(Sukiennice)

직물회관은 13세기경 중앙시장 광장이 형성될 때부터 크라쿠프와 함께한 아주 역사가 깊은 건물이다. 흔히들 말하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이라고 한다. 현재 1층에는 폴란드 전통의 각종 직물, 기념품, 수공예품을 팔고 있고, 2층에는 18~19세기 폴란드 회화와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직물회관을 정면에서 봤을 때, 광장 중앙의 아담 미츠키에비치 동상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반을 접어 놓은 것이 아주 대칭적인 구조를 이룬다. 이처럼 수평성과 수직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건축양식이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1층의 첨두형 아치 역시 대표적인 고딕 양식의 한 형태이다.


직물회관과 광장 중앙의 아담 미츠키에비치 동상, 크라쿠프 공식 만남의 장소로 항시 사람들로 붐빈다


현재의 직물회관은 엄밀히 말해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양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두 양식이 공존하게 된 사연은, 1555년 직물회관에서 발생된 큰 화재 때문이다. 화재 이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이 되었다고...

재건축되기 전 순수 고딕 양식의 직물회관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두 양식이 혼재되면서 더 아름다워진 것 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에 화재가 나서는 안될 일이다. 문득 2008년 2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숭례문 방화 사건이 떠올랐다. 과거 타국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 전쟁의 아픔을 겪었던 역사 등을 비롯해 이런 작은 사건들 하나까지도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직물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나에게는 중앙시장 광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과 같은 느낌이었기에 2층의 미술관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2층의 미술관은 패스하고 1층의 쇼핑몰만 구경해보기로 했다. 물론 구경이 쇼핑으로 바뀌겠지만.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기념품을 득템 하는 재미니까.


우리나라 전통시장 느낌이 물씬 풍긴다


여행을 하면 자신만의 기념품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 경우엔 '그릇'이다. 그 나라의 브랜드 혹은 전통 디자인의 그릇을 모으는 게 나만의 기념품이자 수집품이다. 때마침 직물회관 안에도 그릇 가게가 있었다.


"저 그릇 좀 볼 수 있을까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그릇을 건네준다)"

"얼마예요?"

"62 즈워티."

(*즈워티(PLN): 폴란드 통화 )


한국 돈으로 2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 동유럽 중에서도 물가가 아주 저렴한 편에 속하는 폴란드지만 미리 알아본 가격보다는 조금 비싼 감이 있어 흥정을 시도해봤다.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흥정이다. 긴장되는 순간... 결과는...?


"62 즈워티"


철벽 사장님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인상은 정이 철철 넘칠 것 같은데 어쩜 저렇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나라 전통시장을 닮은 모습에 한창 푸근함에 빠져있었는데 순식간에 푸근함이 싸늘함으로 바뀌었다. 조금 더 흥정을 해볼까 하다가 나만 상처받을 것 같은 예감에 포기했다.(슬픈 예감은 언제나 딱 들어맞으니까.) 사실, 바르샤바에 미리 점찍어 둔 그릇 가게가 있었기에 그릇도 포기했다. 너무 많이 지르면 어쩌나 걱정했던 쇼핑은 막장 드라마 엔딩처럼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유럽 최초,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두 가지 타이틀은 직물회관을 항상 따라다니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에게 있어서 직물회관은 수식어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곳인 것 같다. 중앙시장 광장이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크라쿠프와 함께 써내려 온 역사가 있고, 시장에는 폴란드의 전통, 미술관에는 폴란드의 예술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단순히 크라쿠프의 랜드마크를 넘어서, 크라쿠프 심장이라 감히 칭할만하지 않을까?


약 700여 년이 지난 지금, 크라쿠프의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뜨겁게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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