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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31. 2017

조국의 부흥을 꿈꾼 한 남자

폴란드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

여행을 하다 보면 우연한 만남이 찾아올 때가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길거리에서, 혹은 관광지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조금 특별한 만남이 찾아오기도 한다. 현재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 그 나라가, 그 도시가, 그곳의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 특히나 거리 곳곳에 동상이 많은 유럽에서는 이런 만남이 제법 쉽게 찾아온다.


나는 폴란드를 여행하면서 폴란드 인들의 가슴속에 묻혀있는 감성적인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로 폴란드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Bernard Mickiewicz)다.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의 아담 미츠키에비치 동상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에서 처음 마주친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은 자신을 둘러싼 망토 같은 겉옷을 붙잡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정면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시인하면 떠오르는 감성적이고 부드러울 것만 같은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디서 저런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그가 살아온 인생에 그 답이 있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역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비록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폴란드 3국 분할로 역사 속에 묻힌 과거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그의 조국으로 여기며 다시 부흥하기를 꿈꾸었다.


그는 빌뉴스(현 리투아니아의 수도)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조직에 가담한다. 또한 리투아니아에서는 교사로 일하며 정치적 활동도 같이 하게 된다. 이처럼 조국을 부흥시키고자 애썼지만 이 활동이 반소 정치운동이었다는 명목으로 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로 추방당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러시아 유배생활이 끝난 후,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전전하는 와중에 대표작인 '조상의 황혼 Dziady(1823~33)', '판 타데우시(Pan Tadeusz, 1834)' 등을 발표한다. 각 작품들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그리움과 찬양, 부흥에 대한 열망을 녹여냈다.


공식적으로는 '폴란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엄밀히 말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시인’. 하지만 사실, 본인 당사자는 폴란드보다 리투아니아에 조금 더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들을 보면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판 타데우시'는 "리투아니아! 나의 조국이여!(Litwo! Ojczyzno moja!)"로 시작된다. 또 다른 대표작, '조상의 황혼 Dziady'에서는 과거 리투아니아가 이룬 자취를 로맨틱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아무래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폴란드보다는 리투아니아에 가까웠기에 어쩌면 그쪽으로 더 마음이 쏠리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 여정 속에서도 자신의 대표작을 탄생시켰고 그 안에 과거 부흥했었던 조국에 대한 그리운 마음도 빼놓지 않았다. 인생의 고난과 억압을 이겨낸 그였기에 당당함이라는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바르샤바 신세계 거리, 아담 미츠키에비치 공원의 동상


크라쿠프에서의 첫 번째 만남 이후, 아담 미츠키에비치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재회했다.

바르샤바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길. 그 거리는 바르샤바 신세계 거리라 불린다. 그리고 그 거리 안에 아담 미츠키에비치 공원이 있다. 바로 그곳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바르샤바의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한국인인 나에게는 매우 익숙한 포즈로 날 맞아 주었다. 앞에 태극기만 있으면 완벽한 국기에 대한 경례다. 그래서일까 무언가 결의에 차있는 듯 보였다. 크라쿠프에서 만났을 때보다 그 당당함이 한층 더해져 이제는 시인이 아닌 민족 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더 어울렸다. 펜과 종이로 러시아에 항거한 시인이자 독립투사. 그의 모습 위에 우리나라 윤동주 시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크라쿠프와 바르샤바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다른 도시, 그리고 그가 살았었거나 머문 적이 있는 다른 나라(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폴란드 포즈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교도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의 그는 또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아마 각 나라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듯한 당당한 모습은 어디나 같을 것이다. 그건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그의 진실된 바람과 열망에서 비롯된 모습이니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폴란드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문학 작품들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지금 두 눈 크게 뜨고서 동유럽의 두 나라를 보며 아주 흐뭇해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이제는 어엿한 각각의 한 나라로서 부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현재의 독립된 국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까지 과거 아담 미츠키에비치와 같은 시인이자 민족독립운동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영원히 조국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분명 어디에선가 조국의 더 큰 부흥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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