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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n 19. 2018

내게 남아있는 직업병들

#14.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끌어당겨지는 습관들


 여가활동으로 필리핀 친구 Nathan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스타벅스에서 허겁지겁 커피 주문을 마치고 뒤로 돌아서자 Nathan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나. You don't have to say 'thank you' or 'sorry' all the time.” 계산하는 그 짧은 순간에 저도 모르게 이 말들을 여러 번 내뱉었나 봅니다. 그는 “누나를 만날 때마다 100번은 들은 것 같아.”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절레절레합니다. 이것은 제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아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직업병 탓일 겁니다. 스무 살 때부터 꾸준히 해왔던 아르바이트들. 빵집을 시작으로 커피숍, 야구장, 영화관까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사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아야만 했던 지난날이었지요. 특히 영화관에서 ‘미소지기’라는 직함으로 일을 할 때에는 그에 걸맞게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손님과 얘기를 하는 중에도 입꼬리를 더욱 올려야 하는 추가 업무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도한 친절이 몸에 배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블린에 오더니 두 배로 발현된 모양입니다. SuperValu에서 일하면서 저는 친절한 사원으로 매니지먼트팀 안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심지어 이름까지 Song이니 말 다했지요) 한 매니저는 저에게 ‘Sunshine’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습니다. 여기까진 뭐 좋았으나 일명 ‘껄떡쇠’들이 달라붙기 시작하면서 친절을 조금 중화시킬 필요가 있겠구나 판단했습니다. 가끔 껄떡쇠들이 되도 않는, 전혀 기분이 좋지 않은 Flriting을 시도해서 다른 벨기에 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하였더니 그 원인이 저에게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럽 여성들은 도도하기 그지없어 이런 껄떡쇠들을 ‘FUCK OFF’ 한 마디로 다부지게 차단하는 반면 저는 미소지기 습관을 버리지 못해 입꼬리마저 올리고 그들의 헛소리를 일일이 다 들어주고 있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얘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 오해를 심어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지요.      


 아직도 제 서랍 속에 차곡히 쌓여있는 명함들처럼 몇 가지 직업병도 제 안에 고스란히 남이 있나 봅니다. 한창 지역공동체 라디오국에서 일할 때, 눈 뜨자마자 신보를 검색해본다던지, 대본에 쓸 소재가 고갈되었을 때 멍하니 하나의 노래를 반복 재생해놓고 똑같은 가사를 수십 번씩 종이에 써 내려가며 그 상황을 상상해본다던지 하던 일과들. 이제는 그렇게 산삼 캐듯 열심히 뭔가를 발굴해서 들려줄 청취자도 없는데, 여전히 아침이면 무의식적으로 들려줄 거리를 고민하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또, 그때는 한창 취준생의 신분으로도 머물러 있을 때라 스터디원들과 주기적으로 입사지원서를 검토하고 첨삭해주곤 했는데, 누군가 제 자기소개서를 읽고는 “라디오 PD 자기소개서는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이더라구요. 조금 더 애절하게 쓰시면 좋을 것 같아요!”라는 평을 해주었습니다. 굳이 자기소개를 신파극으로 만들고 싶진 않은데. 그렇지만 별 수 있을까요. 다른 지망생들은 ‘눈물 날 정도로’ 본인을 간절하게 소개한다는데, 저도 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글을 쓸 때면 우울의 밑바닥을 드러낼 정도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회사는 공공기관이었는데, 주 업무는 공문서 작성이었습니다. 가장 처음 배웠던 업무는 한글 파일을 열고 용지 여백을 설정하는 방법. 좌우로 20mm, 머리말/꼬리말 각 15mm. ‘굴림체’ 아니죠. ‘굴림’으로 작성. 반드시 양쪽 정렬. 최대한 간결하게 작성할 것. 혹여나 문장 밖으로 글자가 조금이라도 삐져나올 경우에는 자간을 줄일 것. 그렇지만 자간을 너무 줄여 글자가 찌부되면 안 됨. 그러니까 처음부터 문장을 최대한 짧게 만들 것. 그래서 최종적으로 웬만한 공문은 한 장 이내로 작성. 그렇게 제가 최초로 작성한 보고서의 결과는 “팀장님께서 유영 씨 문서가 너무 문학책 같다고 하셔.”하는 선배의 어퍼컷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문서는 처음 방문했던 소년원의 한 수업 모니터링에 대한 보고서였는데, 선배는 “우리가 이 아이들에 대한 성장일기를 쓰는 건 아니잖아?”라는 한 마디로 이번엔 저를 K.O 시켜버렸습니다. 그간 글을 너무도 감성적으로 써온 탓에 신속, 간결이 생명인 공문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1년 반을 공문서를 쓰는 기계가 되다 보니, 조사를 최대한 줄이고 오로지 단어로만 이어 붙이는 방법에 숙달이 되었습니다. 특정한 몇 글자나 문장형태가 마치 자동완성처럼 손가락에 붙어버렸습니다. ‘당초’라든지 ‘확인 요망’과 같은 것들. 평소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던 단어들인데 팀장님께 문서를 수월하게 결재받기 위해서는 그가 좋아하는 단어를 캐치해 두었다가 무심한 듯 툭툭 첫 장에 던져 놓는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블린 생활을 기록하며 부드러운 문체로 회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공문서가 아님에도 한글 파일을 열 때마다 용지 여백을 먼저 맞추는 것은 이미 체화가 되었나 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또 다른 직업병은, 아마 다들 그렇겠지만 ‘막내본능’이었습니다. 나이 구분이 없는 영어 문화권 아일랜드에 와서도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갈 때면 먼저 물을 따라 돌리곤 했지요. 저는 여기서 나이도 많은 편에 속하고 심지어 이 집단에는 서열조차 존재하질 않는데 몸에 밴 이런 습관은 좀처럼 고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습관들은 내가 지나오며 닫아버린 문 앞에 전부 두고 왔던 것 같은데 왜 여전히 내 안에 잔재하는 것일까. 특히 마지막 회사에서 퇴사하고 난 다음날, 실컷 늦잠을 자고 해방감으로 아침을 맞으며 이불속에서 질렀던 함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토록 긴장하며 배웠던 몇 가지는 의도치 않았음에도 어느새 저의 일부로 자리 잡아 저를 놀라게 합니다. 아르바이트든 직업이든, 퇴사와 함께 그 경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그동안 겪었던 것들 중에 체로도 거를 수 없는 아주 미량의 경험치들이 깊숙이 내려앉아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기, 더블린에서 겪어 나가고 있는 과정들도 내 안에 적체되어 있는 무수한 것들과 찬찬히 융합되어가고 있는 걸까. 언젠가 마음이 들끓을 정도의 고열을 만나게 된다면 그간 켜켜이 쌓인 나의 잠재력도 단숨에 멋지게 폭발하여 누구 하나 알아보는 이 없더라도 홀로 오롯이 작열하는 별 하나를 탄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서른이 된 지금에도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막 지나가는 초단위마저 유용하게 쓰이게 될 거란걸, 이제는 모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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