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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n 12. 2018

대선 투표와 남북정상회담

#13. 타지에서 접하는 대한민국의 중대사 


 심부름으로 문구점에 들렀다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독 텅텅 비어있던 상암동 거리에서 홀로 요란히도 번쩍이던 MBC 건물에 붙어있는 대형 TV에서는 도무지 안 쳐다보고야 배길 수가 없게끔 빠알간 헤드라인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속보! 박근혜 탄핵안 가결!’ 한참을 넋을 놓고 뉴스를 보다가 추운 날씨에 쫓겨나듯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왔습니다. 마침 저희 회사가 있는 건물도 한 언론사 빌딩이라 실내에서도 뉴스를 이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번짐 하나 없이 그어진 ‘역사의 한 획’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올라가서도 뉴스를 접하고는 하던 일을 멈춘 직원들이 탄핵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2016년 12월이었는데, 제가 아일랜드에 건너오는 새해 2월 말까지도 연관된 뉴스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찾아보니 사진을 찍어두었더군요


 3월은 한창 홈스테이 집에 머물 때였습니다. 홈맘 Peggy와 일본인 하우스메이트인 타카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메인 뉴스가 다 지나가고 아주 짤막하게 ‘Impeachment of president in SOUTH KOREA’에 대한 꼭지가 나왔습니다. Peggy가 부엌과 거실을 오고 가며 슬쩍 스크린을 보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Isn't she lovely?” 저는 너무 놀라 “NOT AT ALL”이라고 대답하고 왜 그녀가 탄핵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탄핵이 영어로 뭔지도 몰라 사전을 찾아가며, 되도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통번역을 하고 있었지요. Peggy는 그저, 여자 대통령이나 여자 총리가 드문 세계였으니 여자가 한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것이 신기해서 관심을 툭 던졌던 듯합니다. 평소에 말도 별로 없던 애가 얼굴까지 벌게져가며 전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열변을 토하니 Peggy는 사과했고, 타카는 아베도 별 다를 것 없다며 한 술을 더 얹었습니다.     


 얼마 뒤, 국외부재자 신고를 했습니다. 탄핵 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니 탄핵이 될 만한 치적이 없었더라면 예정대로 한국에서 19대 대선 투표를 했을 텐데. 덕분에 생전 못해볼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이걸 뭐 감사하다고 표현을 해야 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한국보다 2주 먼저 사전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대사관이란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나 방문해야 할 목적이 있는 꽤나 긴급한 업무를 처리해야만 하는 장소로 여겨졌기에 상당히 권위적이고 사무적인 분위기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전 룸메이트였던 쏘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아일랜드 한국대사관은 삐까번쩍한 빌딩이 아닌, 그냥 우리가 더블린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우스 형태였습니다. 여권과 함께 신분 확인 후 투표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편안한 분위기였고 직원들과 하하호호 몇 마디를 나눴던 것도 같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항상 그랬듯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더 공부했다면 100% 확신을 가지고 표를 던질 수 있었을까. 굳이 부류를 나누어야 한다면 저는 감상에 잘 빠지는 류의 인간이라, 내 인생에 대한 중대한 결정마저 가끔은 놀랍도록 순간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논리’를 가지고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이들을 볼 때면 그것이 너무나 멋있게 보이고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특히 대선과 같은, 비단 내 인생 하나에 대한 것만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내가 소속한 최대한의 집단이 힘들게 버텨온 수년간을 어쩌면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에 대해서는 더욱이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이거다!’ 확실한 마음의 정답을 산출해내고 싶었는데. 수 만 가지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나태함에서 비롯된 무지함이라는 생각에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상암동에서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출퇴근 길이 온갖 미디어에 노출되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뉴스마저도 절로 습득이 될 때가 있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인터넷 뉴스를 자주 읽기는 하지만 TV를 잘 보지 않는 탓인지 한국사회에 대한 체감도가 낮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4월, 평소처럼 SuperValu에서 일을 하다가 무지 반가운 얼굴을 'IRISH TIMES' 일면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 조국의 소식을 말 그대로 남의 나라의 신문에서 ‘대문짝만 하게’ 보다니. 하필이면 제가 한국에 없을 때 이런 중대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 극적인 감정을 옆사람과 공유하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했지요. 단골손님들 중에는 이미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라도 된 양 저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분들도 있었고, 한 매니저는 “그래서 이제 한국은 통일이 되는 거야?”하고 정말이지 넌지시도 물어봐 왔습니다.      


@The hands of history


 계산대 위에서 허용된 짧은 시간 안에 굳이 복잡한 남북관계에 대한 설교를 손님들에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웃어 보이고 말았습니다. 자국 신문 일면에 난 기사일지라도 본인들과는 동떨어진 일이라 그런지 헤드라인을 제외하고는 잘 읽지 않는 모양입니다. 반대로 저는 비록 영어로 쓰인 기사이지만 관련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며 스마트폰으로 보는 한국 포털 사이트 뉴스와는 또 다른, 오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남한도 북한도, 미국도 아닌, 어찌 보면 한국과는 딱히 뚜렷한 관계가 없어서 가능할 비교적 객관적인 논지의 이 아일랜드 기사가 이상하게 저에게는 크게 와 닿았습니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분석이나 복잡한 논쟁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요. 간결하게 맺어진 이 기사가 주는 메시지는 우려할 것 하나 없이 그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기사에 툭 하고 제시된 간단한 절차들이 이대로만 순탄하게 착착 처리되어 곧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열망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다고. 그런 단순한 감상이 때로는 득이 되나 봅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3개월 정도가 남았는데, 그 사이에 또 타지에서 나의 조국에 대한 대박 뉴스를 접할 일이 과연 생길 것인가. 자전하느라 바빠 더 큰 우주를 공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지구처럼,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개인적인 변화들에 정신이 팔려 한국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많이 일어났었다는 걸 이제야, 이 글을 쓰면서 실감합니다. 더블린으로 건너올 때에는 제 속조차 너무 시끄러워 스마트폰의 여러 어플들을 지워가며 스스로를 익숙했던 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작업을 했었는데, 이제 슬슬 귀소의 촉을 하나씩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의 유기체가 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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