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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n 23. 2018

아일랜드의 불편한 점, 편리한 점

#15. 속도의 중립적 성질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 기준, 가족이 있는 한국 집을 떠나 아일랜드에서 홀로 지낸지도 어느덧 1년이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멀찍이 떨어진 거리만큼이나 한국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아일랜드의 생활양식이나 문화에 화들짝 놀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처음 더블린에 정착할 때 느꼈던 감정은 ‘불편함’이었습니다. 89년생이라 완전한 디지털 세대가 아님에도, 심지어 나란 인간은 지극히 아날로그 지향적임에도 아일랜드의 여러 시스템들은 제가 마치 시대를 앞서간 사람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역시 한국이 최첨단 산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인 걸까 싶어 살짝 어깨가 빳빳해지려는 찰나, 다른 유럽 친구들에게도 “아이리쉬 사람들 어떻게 이렇게 생활하는지 의문이다!”하는 불평을 듣게 되어 머쓱해진 팔로 기지개나 켜봅니다.     


 홈스테이를 하면서 아일랜드 자택에 처음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홈맘 Peggy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샤워하기 전 보일러는 트는 방법이었습니다. 보일러는 책가방 크기만 했고, 화장실 한편에 달려있었습니다. Peggy는 샤워가 끝난 직후, 보일러는 반드시 꺼야 한다고 수차례나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보일러가 전기세를 잡아먹는 주범이라고 합니다. 네 번 태워 잡고, 거꾸로 태워 잡는 귀뚜라미를 소개하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땀도 별로 안 흘렸겠다, 샤워는 미루고 세수부터 하려는데 이럴 수가! 수도꼭지가 찬 물, 뜨거운 물 따로 나뉘어있습니다. 평소에도 찬물 세수나 샤워를 극도로 싫어하기에 두 꼭지를 동시에 틀어놓고, 찬 물 먼저 두 손에 받은 다음에야 뜨거운 물을 조금 받고 그렇게 반복해야만 적정 온도를 맞출 수 있었지요. 이 부분은 사실 지금까지도, 매일 세수를 하면서도, ‘아니 왜...’라는 원초적인 의문을 풀려야 풀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열쇠. 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번호키가 아닌 실물 열쇠를 사용합니다. 열쇠가 문제가 되는 이유 하나는 제가 심각한 덜렁이이기 때문이오, 다른 하나는 유독 문을 잘 열지 못하는 저의 능력(?) 되겠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나갔다가, 비가 그치면 우산의 존재를 망각하고 빈손으로 칠렐레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말 그대로 백 번은 될 만큼 물건을 꼼꼼히 챙기지 못하는 저에게, 하물며 요 조그만 열쇠는 오죽했을까요.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의무감을 머릿속에 꾹꾹 입력시키기 까지 근 한 달이 걸렸습니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Air BnB에서 자주 묵었는데, 그때마다 문을 잘 열거나 잠그지 못해서 애먹은 적도 부지기수. 호스트는 잘만 열던데. 이것은 번호키에 익숙해져 나의 손가락 근육이 퇴화된 탓일까 생물학적으로 접근해가며 고찰해보기도 했었지요. 집에 관련하여 불편한 것 중 또 하나는 카펫이었습니다. 일생 카펫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일랜드에 살면서 이 얼마나 찜찜한 방바닥인가 체감하는 중입니다. 먼지가 더 많이 쌓이는 것은 기본, 청소기로 머리카락을 흡입하기도 힘듭니다.     


 마지막으로는, 느린 행정체계 속도에 저의 급한 성질머리를 발맞춤 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예를 들면 은행 업무와 같은 것들. 한국에서는 아무리 점심시간에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도 30분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계좌 하나를 만들려 해도 한 달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은행에 먼저 방문해서 약속 날짜를 잡고, 다시 방문하여 계좌 개설에 필요한 문서들을 제출하고, 일주일 후 계좌 번호를 우편물로 따로 받고, 카드가 우편물로 오기까지 또 기다려야 하고... 장점이라면 카드를 받는 순간 감격스러움을 맛볼 수 있다는 것 정도. ‘드디어 수수료 안 내고 카드 긁을 수 있다!!!’하며 말입니다. 또, 평소엔 아무 문제없다가 아플 때면 절실한 병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을 바로 방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GP에 먼저 등록을 하고 날짜를 예약해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드문드문 예약이 필요 없는 병원도 있습니다/응급실 제외) 더블린에 살면서 두 번 크게 아팠었는데, 그때만큼은 다 제쳐두고 한국으로 가버리고 싶은 절망감도 들었습니다.     


 이쯤 되니, ‘왜 아직도 그런 불편한 곳에서 지내고 계신가요?’하는 질문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한국보다 편리한 점들도 물론 몇 가지 있지요. 제일 좋았던 것은 은행 상관없이 ATM에서 인출할 때 수수료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신한은행 체크카드가 있다고 해서 꼭 신한은행 ATM기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1,500원 정도 수수료가 들었던 편의점 ATM기도, 아일랜드 마켓 안에서는 무료입니다. 또, 이건 SuperValu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건데, 계산대에서 물건을 사면서 그 자리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무인 계산기에 물건 스캔을 마친 후에 카드를 기기에 삽입하면 “Do you want cash back?"하는 문구가 스크린에 뜹니다. 그럼 YES를 클릭하고 인출하고자 하는 액수만큼 선택할 수가 있지요. 물론 수수료는 없습니다.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ATM기를 찾아가지 않아도 물건을 사다가 지갑을 열곤 ‘현금이 없네?’하고 미리 인출해둘 수 있으니 말입니다.(그러나 Cashback이 되는 가게는 정해져 있습니다. SuperValu는 가능, Tesco는 불가능)     


 휴대폰 요금을 매달 비싸게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달 기준 €20(한화 기준 약 26,000원 정도)이면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고 전화 문자도 넉넉히 쓸 수 있답니다. 필요할 때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크레딧을 구매하면 되는 시스템이라, 와이파이로 충분히 연명이 가능하다면 굳이 데이터에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커다란 장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단점이 장점으로 바뀐 케이스인데, 바로 ‘무단횡단’입니다. 처음에 더블린에 와서 시내를 살펴보고 있는데 신호등 앞에서 저는 얼음이 되었습니다. 빨간 불인데도 거리낌 없이 길을 건너는 사람들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제가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면 운전자들이 먼저 건너라는 손짓을 보내옵니다. 유럽 친구들과 이에 대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들 말에 따르면 이는 ‘사람 중심’이기 때문에 생긴 관행이라고 합니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차보다 사람을 먼저 지나가게 해주는 배려심이라고 했던가. 해석이 너무 후한 듯싶지만 ‘그래! 너희 행정처리 때문에 답답했던 마음 길거리에서라도 풀어보리라!’하며 빨간불의 횡단보도를 활보합니다.      


 절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서서히 더블린에 물들어 가나 봅니다. 친구들이 한국의 빠르고 신세기적인 각종 시스템에 대해 감탄을 뱉을 때면, 한국이 살기엔 훨씬 편리한 곳이라는 자부심도 들지만, 저는 반세기 정도 퇴보한 듯 한 더블린의 속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는 아이리쉬 손님들을 보며 ‘여유롭다’보다는 ‘느긋하다’는 부정적 형용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일생을 조급증에 시달려 스스로를 옭아매고 채찍질했던 저에게 이 느긋한 더블린이 극약 처방이었나 봅니다. 불안하던 몸짓을 멈추고, 시선도 멈추고. 그렇게 잠깐 서서 저의 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호흡의 속도에 귀 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밟고 있는 더블린 땅의 시곗바늘 속도도 감상해봅니다. 명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조금 떨어진 심박수를 이제는 느낄 수 있습니다. 도착했을 때의 감정은 ‘불편함’이었는데, 떠나기 두 달 전의 감정은 ‘평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이 속도를 유지해야 할 텐데. 무단횡단도, 속도위반도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스스로를 단속시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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