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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n 27. 2018

혼자서 지내는 명절은

#16. 1인용 떡국으로 서른을 맞이하다


 가평에 계신 할아버지 댁은 아직도 저의 어린 시절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할아버지 왈 “이 놈은 어릴 때 저렇게 예쁘더니 지금 너무 변했어!” 그럼 저와 엄마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이 훨씬 용 됐죠!” 받아치는데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굳이 백과사전보다도 두꺼운 앨범들을 가져와 펼쳐놓으시곤 저의 외모 변천사를 마치 성적 그래프처럼 콕콕이도 짚어주시며 야단 아닌 야단을 치십니다. 특히,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썰매를 타고 있는 6살 때의 제 모습을 펼쳐놓으시곤 “봐라! 이때 빨간 모자 예쁘다고 아주 썰매장에서 난리였지!” 그렇게 저의 리즈 시절을 강제로 주입시키시는 할아버지. 수많은 제 사진 중에 제가 유독 애착을 가지는 사진은 큰 액자 속에 담긴, 색동저고리를 입고 아주 샐쭉이 웃고 있는 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액자식 구성’마냥 정말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9살 혹은 10살 때. 그때는 명절이면 항상 작은 아빠 가족들과 저희 집 앞에 모여서 함께 가평으로 내려갔습니다. 가평에서 인천으로 올라가는 길에 에덴 휴게소가 있는데, 제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잣 과자를 사달라고 졸라서 아빠는 항상 하행선에서 상행선으로 유턴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평 에덴 휴게소의 잣 과자는, 제 기준으론 벨기에의 와플보다도 훨씬 맛있습니다. 휴게소에서 가족들과 어묵 가락국수를 한 사발씩 들이키고는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향합니다. 설날이면 저희 송가는 간판을 세워도 무방할 만두공장으로 변신하고(‘떡국’이 아니라 ‘만둣국’ 중심의 가족입니다) 추석이면 송편 공장이 됩니다. 저는 엄마 옆에 앉아 만두든 송편이든 참 야무지게도 빚어, 이 담에 예쁜 딸 낳겠다는 할머니의 덕담도 많이 들었지요. 엄마와 작은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쁠 때에는 저보다 한참 어린 제 동생과 사촌동생을 모아 놓고 그녀들을 어떻게든 웃겨보겠다며 재롱을 부리는 좋은 언니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습니다. 대가족은 아니라 ‘왁자지껄’까지는 아니더라도 떡 찌는 냄새와 함께 소란히 피어났던 유년기의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조금 자란 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식구가 줄게 되었고 제사도 성당 미사로 대체되어 송가 공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설날에는 워낙 만두 덕후인 아빠를 위해 저희 네 가족이서만 소규모로 만두를 빚지만 추석에는 더 이상 송편을 만들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평으로 내려가지도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저희 집으로 하루 오셔서 식사 한 번 하는 것이 전부. 성인이 된 이후에는 명절 연휴면 시험공부하느라 독서실에 박혀있을 때가 많았고, 취직을 한 이후에는 친구들과 여행을 하기에 바빴지요. 그렇게 ‘명절’의 정의를 잊은 지 오래. 더블린에 와서 처음 맞는 추석에 아득한 어린 시절 향수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입에 많이 대지도 않았던 송편이 간절해집니다. 유럽여행 때 예쁘게 사진을 찍으려고 사둔 개량한복을 꺼내 입고는 한국 마트로 장을 보러 갑니다. 송편이 품절이랍니다. 별 일 아닌데 시무룩해져 방개떡을 대신 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잡채에 도전하는데 웬 걸. 지지고 볶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정신없이 불질을 하고 있다가 참기름 뚜껑을 연 그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해집니다. 

     

 내가 집어 든 이것은 참기름 병이 아니라 향수병인가. 가족이 보고 싶기야 하지만 더블린 생활에 나름 재미를 붙이고 있던 터라 그동안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 고소한 냄새가 후각이 아닌 전두엽을 자극하다니. 이렇게 향우회나 한인회가 생기는 거구나 어렴풋이 그 설립 의도를 추정해볼 수 있었지요. 하우스 메이트들에게도 오늘은 한국의 큰 명절이라고 설명하고 잡채나 떡을 좀 나누어 주었습니다. 파스타마냥 잡채를 한 접시씩 맛있게 비우는 모습을 보니 흐뭇합니다. 설날에도 외국인 친구들과 떡국을 나눠 먹고 한국에선 오늘이 새해의 시작이라며 덕담을 나누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지요.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심지어 가족들과 함께 있음에도 명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외국에서 홀로 명절의 명목을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사실 돌이켜봐도, 딱히 대단할 것 없는 명절이었는데. 그저 작은 엄마가 온다고, 사촌 동생이 온다고 명절 며칠 전부터 하루하루를 꼬박꼬박 세어가며 기다렸던 나날들.      


 그땐 상처도 의무감도 없이, 그저 나를 무한으로 예뻐해 주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조차 알지 못할 때였기에, 순수성으로 회귀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가족의 테두리가 그리운 것일까요. 한 살 더 먹기를 기대하며 잔뜩 삼켰던 떡만둣국과는 정반대의 마음으로, 그러나 엄마를 흉내 내어 제법 비슷한 맛의 떡국 한 그릇으로, 그렇게 더블린에서 서른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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