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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n 30. 2018

다섯 번째 월드컵

#17. 잊을 수 없는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2014년에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와. 다음 월드컵이면 내가 서른이네? 징그럽다!’ 그런데 그 징그러운 2018년 월드컵을 이렇게 뜬금없이 더블린에서 시청하게 되다니.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시차가 크지 않아 오후 1시, 3시, 7시면 월드컵 경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 이름을 확인하는데,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았습니다. 이럴 때 내가 구세대가 되었다는 걸 가장 크게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복장이 터지는 마음으로 스웨덴 전과 멕시코 전 두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독일 전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후반전 30분 정도밖에 보지 못했지만, 경기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독일 승이거나 0-0이겠거니 포기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동료가 와서는 “Song! Korea won!”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이 자식이. 누굴 약 올리나. 뻥 치지 말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조금 이따 한국 손님이 들어오셔서는 “한국 분이세요? 저희 이겼어요! 2:0으로!!!” 승리의 전보를 전달해주었습니다. 동포의 입으로 직접 소식을 들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겼구나 환희할 수 있었지요.     


@ 안정환의 해설이 너무나 듣고 싶었으나, 저에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월드컵 최초의 기억은 아주 운 좋게도 2002년입니다. 당시 열네 살 중학생.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는데 엄마가 웬일로 저녁 먹으라는 말도 없이 TV 앞에 앉아계셨습니다. 축구경기였습니다. ‘그렇지! 그렇지!’하며 엄마는 누군가에게 열렬히 동의하고 계셨습니다. 때마침 황선홍 선수가 폴란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습니다. 붉은 관중석의 엄청난 환호성에 저도 경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고, 간간이 엄마에게 “프리킥이 뭐야? 저건 왜 반칙이야?”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통해 축구지식을 속성으로 전수받고는 함께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유상철 선수의 두 번째 골이 터졌습니다. 엄마와 와아- 소리를 질렀더니 조신하게 책을 읽고 계시던 아빠마저도 고개를 돌려 리플레이 화면을 보십니다. 아빠는 운동을 하는 것도, 심지어 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엄마는 줄곧 ‘남자가 왜 그래?’라며 핀잔을 주시곤 했는데, 그럼 아빠는 “왜! 남자라고 꼭 운동을 좋아해야만 하나?”하는 전통 성 역할에 반하는, 성 평등 운동의 선두주자다운 면모를 그때부터 보이셨습니다. 

     

 폴란드전으로 축구에 재미를 붙이게 된 저는 그 이후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집 바로 앞에 있는 문학경기장으로 축구를 보러 가기도 했고, 만석이면 도로 친구 집으로 돌아와 경기를 함께 봤습니다. 5천 원짜리 ‘BE THE REDS’ 티셔츠를 어디든 입고 다녔고, 학교에서도 온통 월드컵 얘기뿐이었지요. 신예 박지성의 골로 포르투갈을 집으로 보내고 16강 진출, 유독 힘겨운 경기였던 이탈리아 전도 설기현 선수의 왼발 슛과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로 8강까지 가고야 말았습니다. 이 정도도 만족스러웠는데 태극전사들은 멈출 기미가 없었습니다. 승부차기까지 진행된 스페인 전. 한 스페인 선수의 슛을 아주 안정적으로 잡아내고는 카메라를 보고 씨익 웃던 거미손 이운재 선수의 표정은 다시 생각해도 엔돌핀을 솟구치게 만듭니다. 이윽고 마지막 키커 홍명보의 골로 한국은 기적처럼 4강까지 진출해냈습니다. 이제는 이판사판. ‘가자! 요코하마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플래카드가 경기장 여기저기서 보였고, 당차게 오르는 기세로는 우승도 가능해 보였지만 독일 전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이 4위라니. 한반도 전체가 들썩일 수밖에 없었지요.     


 2002년 축구가 재미있었던 점은 당시 유명했던 선수든 전혀 처음 보는 선수든 골고루 톡톡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위에 득점한 선수들 말고도, 제가 너무 좋아했던 플레이어 악동 이천수(개인적으로 당시 이천수 선수의 기량으로 한 골 정도 넣어줬었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움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해설도 똑 부러지게 하지만 공도 참 똑 부러지게 찼던 이영표 선수, ‘명보야 밥 먹자’등 각종 거칠고도 솔직한 어록으로 여심을 흔들었던 미드필더 김남일, 무게감이 느껴지는 배트맨 김태영, 이을용, 송종국, 김태욱, 차두리 등 그 누구에게 볼이 가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거스 히딩크는 희동구라는 한국 이름이 떠돌 정도로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포츠를 보면서 이렇게 선수들 하나하나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건 200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조수미의 ‘We are the champions’나 윤도현 밴드의 ‘오! 필승 코리아’가 들려올 때면, 16화음으로 울리던 저의 벨소리와 함께 그때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2002년 신화는 4강에서 멈췄지만 4년 뒤 독일 월드컵을 향한 국민들의 기대는 한껏 치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행히 고2.(2002년 수능성적 평균은 평소 때보다 훨씬 낮았다고 합니다. 역시 월드컵의 위력이란) 새벽마다 엄마와 함께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경기를 봤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스위스 전이었는데, 부심이 올린 오프사이드 깃발에도 불구 스위스 선수가 골을 넣었습니다. 이윽고 주심이 온사이드 판정을 했고 우리 선수들은 땅을 치며 울었습니다. 16강 탈락이라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또 4년은 흘러 2010년이 되었고, 저는 대학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치맥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호프집에서 혹은 문학경기장에서 맥주로 더욱 오른 흥을 16강 진출과 함께 분출시킬 수 있었습니다. 2014년은 분명 월드컵 경기를 전부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취준생이었던지라 같은 시기에 입사시험이 겹쳐서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응원하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벌써 2018년 월드컵 예선이 끝났습니다. 한국에 있지도 않고, 한국인들과 같이 경기를 보지 못해서 함께 응원하는 재미라든가 단합력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월드컵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장 강력하게 느끼게 해주는 소재인 것 같습니다. 아르바이트 쉬는 시간, 독일 전 하이라이트를 동료들과 함께 보며 김영권 선수와 손흥민 선수의 근성 넘치는 두 골을 확인했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축구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면서, 마치 내가 뭐라도 해낸 양,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 자랑스러운, 이상하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 듭니다. 다음 월드컵이면 생애 첫 월드컵을 봤던 때에서 20년이 지나가게 됩니다. 맙소사. 그때는 서른넷. 그때에는 어디서 누구와 함께 월드컵을 보게 될는지.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의 결과가 매번 예측 불가능한 것처럼 제 인생의 갈피도 그런가 봅니다.


 2002년과 2018년 사이에 세 번의 월드컵이 있었음에도, 2002년의 기억이 더욱 생생한 이유는 첫 경험이었기 때문일까, 최고의 성적이 너무 깊숙이 각인되었기 때문일까. 2002 월드컵의 산 증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면서도 고역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진 큰 축복 중 하나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라던데. 멀어진 과거로 인한 기대치는 조금 낮추고, 현재 위치를 점검해야겠습니다. 축구든 제 인생이든, 뒤돌아보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를.


@번외. 저의 멕시코 친구들이 그룹채팅방 이름을 이렇게 바꾸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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