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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l 07. 2018

인종차별

#18. 인종차별주의자였을지도 모르는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더블린 번화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보통 맥주를 박스채로 사가며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아이리쉬 아저씨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겪은 대부분의 아이리쉬 손님들은 넉살이 좋아 “Hi love~” 다정히도 호칭하며 오늘 날씨 정말 춥다든지 왜 내 신분증은 검사하지 않냐든지 등 먼저 농을 걸어주곤 합니다. 아직도 아이리쉬 악센트에는 익숙해지질 못해 잘 못 알아듣는 날에는 하하 선전용 미소를 띠며 ”Yeah. Right'만 되풀이하지만 혹여나 손님의 말을 100% 이해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도 주절주절 같이 수다를 떨곤 하지요. 제 농담에 크하하 호탕하게 웃은 그 손님은 저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갑절로 해주고 싶었는지 대화 말미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쎼쎼”     


 사실 너무 흔한 일입니다. 초면에 ‘니하오~’하고 인사를 걸어오는 일. 그럼 저는 “I am not Chinese."하며 애석하게 웃곤 하는데 그럼 또 저의 얼굴에 ”Oh. Japanese?"라는 쨉이 날아옵니다. 놉! 하고 대답하면 “Then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돌아오는 질문. 윽. 그 질문은 비수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이 싸람들이 중국이랑 일본만 알고 한국은 모르는구나 하며 말이지요. 이것은 마치 어느 유럽의 유명한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중국어 일본어 가이드는 다 있으면서 한국어 가이드만 없는 그런 느낌과 비슷하달까요. 그럼 또 저는 구겨진 표정을 열심히 다려가며 ”From Korea"라고 소개합니다. 휴 이제 질문 타임은 끝났겠지 안도하려는 순간 라이트가 직빵으로 날아옵니다. “Oh! North or South?"     


 북한에서 중국까지 헤엄친 후 전 재산을 몽땅 털어 가짜 여권을 만들어 러시아로 갔다가 더블린에 혼자 정착했다며, 탈출할 때는 4명이었는데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부디 살아는 있어야 할 텐데 아련한 표정을 짓고(가끔 친구들이나 동료들한테 이렇게 장난을 치곤했습니다)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른 채 굳이 친절히 South Korean이라고 대답해줍니다. 매번 되풀이되는 이 대화의 패턴. 지겨워 죽을 맛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도 중국어를 쓰지 않느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인종차별은 아니겠지만 괜히 속상 해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럴 때마다 제가 탐탁지 않아한다는 걸 아는 매니저는 “왜 기분이 나쁘다는 거야? 우리 눈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똑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구별할 수가 없어.”라고 합니다. 하긴. 우리도 서양 사람들을 보면 무조건 “미국 사람이에요?”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싶어 그다음부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했지요.     


 어느 날, 진열대 높은 곳을 정리하느라 사다리를 밟고 서있었는데 웬 백발의 신사가 키가 몇이냐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말에 저도 하하 웃으며 한 2m 정도 될 거라고 받아치고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영국 사람이고 더블린에 여행을 왔다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저에게 “Are you Irish?"하고 묻습니다. 그런 질문은 난생처음이라 왓! 하고 하하 웃으며 한국 사람이며 더블린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얘기했고, 그 후로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영국 신사는 Supervalu를 떠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Chinese니 Japanese니 하는 쨉 라이트 보다도 강한 킥을 한 방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걸까요? 더블린에 살고 있는 아시아인이 정말 Irish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한국에 사는 이국적인 외모의 청년도 토종 한국인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늘 나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왔는데 가해자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순간적으로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그분이 새삼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되도록 겉모습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아직도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고치기가 영 힘이 드나 봅니다. 이제라도 천천히 시야를 넓혀갈 수 있을까요. 걱정은 되지만 그 날 만났던 영국의 백발 신사를 떠올리면서 이제는 누군가 Chinese냐고 물어볼 때 "I am Irish"라고 통 큰 뻥도 좀 쳐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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