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석영 Jul 08. 2018

성희롱과 농담의 경계

#19. 모든 해답은 당신 안에 있소이다

   

 엄격한 가톨릭 국교로, 유럽 국가 중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아일랜드. 하지만 유럽의 성문화는 역시 어디나 비슷한가 봅니다.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할 즈음, 낯을 무진장 가리는 저는 초심자일 때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발랄함을 유지하면서 동료들과 안면을 트며 조금씩 친해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가게에 한국인은 저 하나밖에 없었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어디 한 군데 모국어로 제대로 물어볼 곳이 없어 깨나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그럼에도 저의 친절한 동료들은 늘 제가 마트 한가운데서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을 때면 “Are you okay?”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지긋이 저를 살펴보고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도와주곤 했습니다. 퇴근 시간 정각이 땡! 하면 얼른 집에 가라며, 잘 적응하고 있냐며 다독여주던 그들에게 감동을 받으며, 이렇게 멀리 건너와서도 좋은 연이 닿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저도 신이 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같잖은 농담을 건네 보기도 하며 그들이 제 농담을 이해하고 웃기라도 하는 날에는 발박수를 치며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열대에서 콘돔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크로아티아 동료가 왼 손으로 콘돔 하나를 집어 들고, 오른손으론 제 팔을 잡아끌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Song! Let's go to use it!" 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왓더헬?! 시방 이것이 나를 지금 성희롱한 것이여?’라는 제 안의 조선 선비의 자아가 성대를 관통하면서는 “Haha... What are you doing...?” 자신이 없는 목소리로 대체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성희롱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동료들의 농담은 계속되었습니다. “I don't like chocolate.”라고 하면 “Oh. Then what do you spread on your boyfriend?”라고 돌아오는 질문. 떨어지는 물건을 선반에 가슴을 바짝 붙여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떨어뜨렸더니 "Oh. shame! If only you had bigger boobs." 제 자신보다 저의 빈약한 현실을 더욱 안타까워해주는 기묘한 친절함.   

 

 이 모든 것들을 한국사회 안에서 한국어로 번역해본다면 성희롱이 정답이겠지요. 그러나 내가 소위 말하는 ‘프로불편러’인 걸까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긴 아일랜드니까.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지. 사실 저는 미드, 특히 ‘프렌즈’의 광팬이라 드라마 속 웬만한 성적인 농담을 듣고 해갤갤 웃어댄 적도 많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음담패설의 중역 정도는 차지했었는데, 왜 여기서는 이렇게 Naive 하게 느껴지는 건지. 어쨌든 동료들의 성적 농담을 단순 ‘농담’으로 받아들이려 노력은 하고 있었는데 한 동료의 장난이 점점 제 상식선에서 지나치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하루는 집에 가면서도 그 말이 생각나 잘 때까지 기분이 나쁠 정도였고 그 때문이지 하필 악몽을 꾸곤 아주 청량한 하늘 아래 눈을 떴음에도 불구 언짢은 상태였지요. 그리곤 집에서 글을 쓰다가 문득 제가 이전에 썼던 ‘나의 속도’에 대한 글을 뒤져보게 되었고 다시 원론으로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더블린에 왔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이 발을 맞추려 하지 말고 나의 속도를 찾을 것     


 여기서 ‘속도’를 ‘기준’으로 치환하여 동료들의 농담에 대입해 보았습니다. ‘뭐, 가슴 같은 이야기쯤이야 웃기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니 같이 맞장구를 쳤지만 어제 들은 얘기는 확실히 난 기분이 나빴어.’ 단숨에 정리가 되더군요. 내가 프렌즈의 성적 농담을 듣고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조이와 모니카, 챈들러는 진짜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이고, 내가 친구들과 음담패설에서 자유자재로 드리블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이 꽤 오래되어 서로가 뱉는 몹쓸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날, 또 그 능구렁이 같은 동료가 또 히죽이 죽 웃으며 다가와 귓속말을 하려는 찰나 저는 몹시도 정중히 말했습니다. “미안한데, 우리처럼 아직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 네가 하는 농담들, 한국에선 모두 성희롱에 속해. 그래서 한국인인 내가 느끼기엔 불편하니까 조심해줄래?” 그러자 이렇게 말합디다. “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피자 먹으면서 몸으로 가까워져 볼래?”     


 이건 뭐 유럽판 라면 먹고 갈래도 아니고. 나름 엄숙한 표정으로 한 진지한 경고가 먹히지 않자 조선 선비 자아는 이번엔 성대에서 검열을 거치지 못했는지 아이리쉬판 상놈의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Fuck you!!!”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공책에 철 9를 열심히 그렸던 것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이 단어를 이렇게 마트 한가운데서 크게 외치게 될 줄이야. 그는 잠깐은 당황한 듯했지만 또 해실해실 웃고는 제 어깨를 한 번 탁 치고, “OK. Sorry.”하곤 뒤돌아 가더군요. 알아들은 거야 뭐야 싶었지만 일단 불쾌함을 표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했습니다. 다음부터 만날 땐 그저 “Song!”하고 반갑게 인사할 뿐, 지저분한 농담은 건네지 않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한국 여성 동지분들에게 고합니다. 생활하고 있는 곳의 분위기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기준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을 때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건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말은 예의 없는 게 아닐까 쓴소리가 힘들면 정색하고 빤히 쳐다봐주는 것 정도라도)


 뭐, 지금이야 동료들과 많이 가까워져 저런 농담 따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진 것이 함정이지만, 아일랜드에서 점점 더 단단하게 저의 알맹이를 다듬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종차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