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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서 주운 재료들
by 송유영 Jul 08. 2018

재난에 대처하는 아일랜드의 자세

#20. 기상천외한 그들만의 비상식량


 중1 때였던 것 같습니다. 성당 미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어김없이 김밥천국에서 푼돈 모아 치즈 라볶이와 참치김밥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야? 어휴 이것아. 지금 태풍 때문에 난리인데 무슨 김밥천국이야! 김밥천국 간판에 맞아 죽기 전에 빨리 들어와!” 간판에 맞아 죽는다니. 남은 음식을 후다닥 먹고는 친구들과 셋이서 팔짱을 끼고 건물 간판들이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두리번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름이면 지하상가가 물에 잠길 정도의 물난리나,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여러 집 유리창을 깨뜨린 힘센 태풍, 선생님들이 도로에 발 묶여 출근하지 못해서 수업 없이 눈싸움이나 했던 폭설 등 재난을 꽤나 가까이서 봐왔고, 더욱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곳곳을 뉴스를 통해 접해왔기에 ‘재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위험한 현상을 내포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지요.     


 더블린에 온 후, 두 번의 재난경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지난해 10월 태풍 오필리아. 아르바이트를 가기 딱 몇 시간 전, 오늘은 가게 문을 닫게 되었으니 올 필요 없다는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아싸 싶었고, 휴교령과 함께 버스 운행조차 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보고는 심각성을 인지했습니다. ‘오 이거 범상치 않은 걸. 강력 테이프라도 사다가 창문에 붙여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마음으로 집 앞의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테이프는 팔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에라이! 어차피 창문도 작으니 괜찮겠거니 하며 식재료나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는데, 너무나 긴 줄에 1차로 놀랐고 그 모두가 들고 있는 어마어마한 비상식량에 2차 충격 상태. 그것은 참치도 라면도 아닌, 맥주 박스, 아니 궤짝이었습니다. 아하. 기네스의 나라, 아일랜드가 태풍에 대처하는 방법은 이렇구나. 황당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태풍 맞이를 준비한 아이리쉬들이 허탈하리만큼 바람은 그저 선선했습니다. 평소보다 강풍이긴 했지만 이걸 과연 ‘태풍’이라고 명명해도 되는 것일까 싶었지요. 이 정도 규모로 휴교령이 내려진다니, 아일랜드 아이들 참 좋겠다 그런 생각뿐이 없었습니다. 더블린에서 경험한 1차 재난이 그렇게 싱겁게 지나가고 나니 2차로 경고된 재난에는 별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올해 2월, 폭설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뉴스에서는 연신 몇십 년만의 폭설이라고 시끌벅적했고 이번에도 역시 버스 운행이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러 갈 수 없는 동료들의 대타로 SuperValu에 며칠 더 불려 나갔고, 전쟁통과 같은 슈퍼마켓의 참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각종 빵, 우유, 계란 등 재고는 이미 바닥이 났고,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손님의 줄은 저만치.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습니다. 보통 맥주 박스를 오프라이센스 코너에 말 그대로 잔.뜩. 쌓아두는데, 맥주가 다 팔리는 바람에 새삼 그 코너가 아주 널찍한 공간이었구나 깨달았지요.     


 그러나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송보송한 눈송이들이 쌓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경험한 폭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지요. 이 정도면 그냥 우리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오길 바라는 눈 정도인데. 하지만 문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자체가 눈이 많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 이 정도 강설량에도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직면한 장소는 화장실이었습니다. 일을 보고 레버를 내렸는데, 글쎄 물이 내려가질 않는 겁니다. 아악!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 이런 일에 창피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가까스로 바가지를 찾아 물을 퍼부어 물을 내리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요. 그리고는 하우스메이트들에게도 바가지에 물을 미리 채워놓으라며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샤워를 하려니, 이번엔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도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저는 농활 때의 기억을 살려 포트로 끓인 물과 찬물을 적절히 섞어 바가지에 받아서 시골 샤워를 하며 청결함을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재난’이라고 하면 미리 방지할 여러 방법들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고지하고, 우리도 그에 맞춰 뭐든 최대한 준비하려는 노력을 들였던 것 같은데. 아일랜드에서의 ‘재난’ 대비란 어차피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맥주나 마시며 쉬자 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몸소 실천하는 것만 같습니다. 개미와 베짱이처럼, 극과 극의 성질이라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배워온 방법과 이렇게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게 참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알바를 마치고 버스도 없어 매니저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지친 몸을 터덜터덜 끌고 오는 길에 이웃집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보고는 미소 짓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하며, 저도 아이리쉬마냥 기네스 한 잔에 창 밖의 풍경을 즐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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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더블린에서 주운 재료들
익숙했던 품 바깥으로 나와 아슬아슬한 더블린 일상에서 혹은 삐걱삐걱 여행하며 주운 재료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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