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매일 마주하며 살고 있구나
저의 스물은 '당연히' 정정당당한 호프집 출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전, 고3 그 기나긴 겨울방학을, 저와 친구들은 어쩜 그리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호프집에서 술을 마셔댔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저희는 큰 물에서 놀기 전 일렁이는 약간의 두려움과 한껏 들뜨는 마음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쏘맥에 억지로 푹 담가 그 취기를 오래오래 지속시켰습니다. 모든 게 리셋되는 느낌. “난 이제 어른이다! 야호!”하고 메아리 외치고 싶은 기분. 명문대고 나발이고 할 것 없이 10대 때 참 오래도록 꿈꿔왔던 대학생이라는 로망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게 그저 행복했지요. 이제는 머리스타일도 내 맘대로, 화장도 예쁘게 할 수 있고 하이힐도 신을 수 있다는 아주 원초적인 자유가 가장 반가웠습니다.
저의 서른은 새해 전 날 마신 와인의 그득한 산기로 인한 위염(어쩌면 어울리지도 않는 와인때문이었을지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쏘맥은 담을 수도 없이 저의 간은 유약해져 있었지요. 시끌시끌하고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따뜻한 집에서 정말 조용하게 와인 한 잔(아니 반 병?) 마시며 뉴스로 런던의 카운트다운 쇼를 본 것이 전부.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다니. 그것은 저에게 밀레니엄과 같았습니다. 신기하게 이번엔 모든 것이 축적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나의 자잘 자잘한 변화들이, 또는 나를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진짜 서른이 되었잖아? 제길!” 땅을 치고 싶은 기분. 10년 동안 계획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저는 또 기대했습니다. 앞으로 10년은 또 어떻게 우회하며 나를 요리조리 끌어갈는지. 생전 있어본 적 없는 ‘여유’라는 것이 마음속에 한 4평 남짓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스무 살의 저는 시끌벅적한 서울 나들이를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신촌에서 동기들과 선배들과 막걸리를 마셨던 여름은 철없게도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밤새 놀아도 다음 날이면 벌떡 일어나 네이트온으로 또 같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깔깔 웃어대며 싸이월드에 어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도 사진으로 또 다이어리로 기록을 남겼었더랬지요. 그때의 나는 어떻게 화장을 해야 더 예쁘게 보일지, 어떻게 하면 남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던 것 같습니다. 또 문득문득 그 좁은 인간관계 속에서도 갈등이 있어 꽤나 마음고생을 했었는데, 그 어린것이 왜 그렇게 인간관계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 그리도 심오하게 고찰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귀엽기만 합니다.
서른 살이 된 나는 글쎄. 철든다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그대로다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 안에 스무 살 때의 내가 얼마 큼이나 남아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일도 많았고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참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겁니다. 지금의 나는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며 술은 여전히 사랑하지만 밤새 놀고 싶은 욕구는 사라진 지 오래. 술을 좀 마시는 날은 다음날의 여파로 신체적 나이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SNS 계정은 없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종이에 손으로 사박사박 써나가곤 하고,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남과 거리를 적당히 둘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손에 꼽을 정도의 적은 숫자지만 나의 친구들만을 지독히도 사랑하며 그들은 나를 진짜 친구로 생각할지 요만치도 재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가장 큰 변화라면 아마 중심의 이동이지 않을까. 스무 살에는 나의 중심이 외부에 있었다면 서른의 나의 중심은 오직 저의 내면에 있습니다. 진기한 경험이지요. 비록 10년이라는 세월이 폭풍처럼 저의 피부와 신체에 타격을 주었을지언정 마음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제가 그렇게나 애정 하는 고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했는데 나의 서른은 감사하게도 조금씩 새로운 것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른이라고 하면 다 끝났다는 생각에(도대체 뭐가 끝났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늘 조급했던 이십 대의 나를 돌아보며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주고 싶습니다. 천천히 와도 된다고. 다시 보니까 아직도 갈 길이 참 멀다 얘야. 넌 달리기도 잘 못하잖아. 애초에 계주를 할 요건도 못 된다구. 그냥 천천히 와라. 천천히, 그렇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더 꼭꼭 길을 밟아 더욱 깊은 자국들을 남기며, 풍경들이 변화하는 순간 순간을 감상하며 걸어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