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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l 17. 2018

예쁜 지폐와 예쁜 마음

#22. 지폐와 함께 선순환되는 마음들


 그는 아마 제가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던 스무 살 때부터 존재했을 겁니다. 약 5년간 제 깊숙한 내면에 자리 잡아 저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명령을 해왔습니다. 그는 바로... 선과 악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거스름돈'으로 말이지요. 일정 나이가 되니 돈을 실질적으로 만져가며 일을 할 기회가 없어져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더블린 슈퍼마켓에서 일을 시작하니 그가 다시 빳빳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계산대 앞에서 친절한 손님이 오면 금고를 뒤적여서 제일 깨끗하고 예쁜 지폐를 드리고, 불친절한 손님을 맞이할 때면 찢어지거나 꼬깃꼬깃한 지폐를 주라며. 한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이 염라대왕이, 화폐가 유로로 바뀐 이 더블린에서 깨어나더니 뒷짐을 지곤 헛기침을 해가며 다시 저를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SuperValu의 대부분의 손님들은 참 상냥했습니다. 특히 주말 아침이면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은 저를 더욱 예뻐라 해주셨는데, 아마 어린 외국인 친구가 타지에서 고생한다는 마음으로 보내주셨을 애정 어린 눈빛과 위로의 토닥임이었겠지요. 셀프 계산대 이용을 어려워하시기에, 그들이 물건이 한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힘없이 밀고 체크아웃으로 들어올 때면, 제가 그것들을 카운터로 대신 끌고 와 일일이 스캔해드리고, 가방에도 하나씩 담아드리며 거스름돈을 그 주름지고 작은 손에 꼭 쥐어드리곤 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저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매번 ‘Thank you’하며 고마움을 표현하시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음을 머금고 대화를 걸어주는 손님들, 계산이 끝나고서 “Have a nice day!”라고 진심으로 바라 주는 것 같은 손님들에겐, 마음 같아서는 서비스로 떡 하나라도 더 얹어주고 싶으나 그럴 수 없어 거스름돈으로 드려야 하는 지폐라도 예쁜 것들로만 쏙쏙 골라 드리곤 했지요.     


 반면에 무례한 손님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셀프 계산대 이용을 도와줄라 치면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들,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길 바라게 만드는, 술이나 약에 취해 고성방가 하는 사람들. 원래 성격도 소극적인 탓에 한국에서도 이런 부류의 손님들을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거나 화장실로 들어가 눈물을 훔쳐내곤 했었지요. 더블린에 와서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신분에 더욱 위축되었고, 누가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기세를 보이면 다 제가 잘못해서 그러겠거니 하며 스스로를 탓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고, 손님들의 웬만한 요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부터는 그것은 비단 ‘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What the fucking are you doing?” 그럼 저도 “I am fucking helping you.”하고 받아치고, “영어도 잘 못하는 게 왜 여기서 일하고 있냐? 너 중국에서 왔냐?”이런 말에도 “Excuse me? You don't need to be mean.”하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평하게 사태를 마무리시키는 법을, 스스로도 믿기 힘들지만 생존하려다 보니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본 염라대왕은 당연히 ‘저기 저 구질구질 냄새나는 지폐를 쥐어 주거라.’하고 저에게 귓속말을 해왔지요. 그럼 저는 또 그에 편승하여 금고 한 칸에 마련된 더러운 지폐들, 심지어 반토막이 난 지폐를(한국 가게에서는 애초에 찢어진 지폐조차 받지를 않는데, 여기서는 반토막이 나도 일단 받더군요) 그들에게 거스름돈으로 주곤 했습니다. 정말 찌질하고도 티 도 안 나는 복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물건을 사며 꼬깃꼬깃 냄새나는 지폐를 내밀었고, 정말 받기 싫었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니기에 다음에 만나게 될 무례한 이에게 전해줘야겠다 생각하며 그 돈을 집어 금고 한 칸에 넣어두는 찰나에,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내가 지폐를 선별하여 그들에게 준다고 한들, 이 지폐가 영영 그들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닌데. 좋은 사람에게 줬을 예쁜 지폐가 악덕한 이의 손에 넘어갔을 수도 있고, 무례하다 생각한 이에게 갔을 더러운 지폐가 인품 좋은 사람의 지갑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내 것도 아닌 이 금고의 돈을, 혹은 결국에는 이 가게의 소유도 아니게 될 돈을 이렇게 선심 쓰듯 혹은 생색내듯 거스름 해 주는 마음이란 얼마나 무용지물인 것인가. 어리석기 그지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이 염라대왕을 내보내지 않을 계획입니다.


 지폐 하나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더라도 계산대에서 오고 갔던 따뜻한 말 한마디라던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정 같은 것들은 누군가의 마음 심해층에 무거이 가라앉아 예쁘게 자리 잡았으면. 그리하여 예쁜 마음들이 더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최대한 많은 이들 사이에서 지폐와 함께 선순환이 될 수 있었으면. 바라며, 오늘도 염라대왕은 나무망치를 들고 책상을 땅땅 치며 열심히 재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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