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유영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더블린에 오면서 가장 기대되면서도 두려웠던 것, 바로 독립생활이었습니다. 대학도 집 근처에서 다녔고, 회사도 약 1시간 거리로 통근하게 되는 바람에 도무지 집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지요. 한창 부모님과 갈등을 빚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서른이 되면 반드시 독립할 거야!’라고 다짐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계획보다 한 살 어린 시점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1 지망 지역 서울 연희동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리피강 남단에 위치한 마을 'Rathgar'에서 아이리쉬 영어 선생님 Ian과 스페인 직장여성 Jimena와 공유하게 된 작은 주택. 마침 이사를 들어가는 날이 부활절이라, 그들은 거실에 Welcome카드와 작은 계란 초콜릿을 저를 위한 환영 선물로 놓아두었습니다. ‘참 친절한 사람들이네’ 기분이 좋았는데, 기대와 달리 그들과의 동거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첫인상만큼 좋은 사람들임에는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양극의 성질을 띠는 위생관념이었지요. 방이야 저만의 공간이지만 공동 구역인 주방과 거실은 정말 이런 표현 쓰고 싶지 않지만 말.잇.못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것이 아니더라도 보이는 족족 전부 설거지하고 쓸고 닦았으나 이내 그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번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과장 좀 보태서 한 수 백 마리의 날파리가 튀어나와 천장에 다닥다닥 붙었습니다. 아악!!! 비명을 지르고 당장 살충제 스프레이를 집안 가득 뿌렸는데, 그게 얼마나 지독했던지 화재 알람까지 울릴 정도였지요. 당장 Ian에게 해결책을 강구하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이렇게 답장이 왔습니다. “It's fine. They come and go." 엄마가 청소하면서 그토록 잔소리를 했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지요. 가족이 아닌 이들과 함께 산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엄마는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의 엄마가 되어주었지만(심지어 아빠의 엄마마저도) 이 곳에 엄마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자유는 자유였습니다. 평소에 엄격한 통금시간에 외박은 금물이었던 부모님의 통제 하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시공간에 놓이다니. 친구들과 클럽도 실컷 가고, 시간이 너무 늦으면 가까운 친구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며 약 10년 전에나 누렸어야 할 재미를 서른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팔청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신체 때문인지, 아니면 원체 클러빙에는 흥미가 없어서인지 귀소본능은 곧 발동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놀고 싶어도 엄마 아빠한테 혼날 게 두려워 술에 취해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더 있으라고 붙잡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강제로 달려가야만 했지만, 이제는 아주 자발적이었지요. 친구들이 그렇게 집에서 자고 가라고 원성 해도 저는 굳이 비싼 택시를 타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아무리 친구 집이 더 크고 좋다한들, 내 방만큼 나를 포근히 안아주지는 않았습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괄목할 만한 변화는 갑작스레 생긴 생필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램프부터 주방용품, 욕실용품 등. 심지어 청결한 카펫 유지를 위해 청소기나 공기청정기까지 마련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전 생각지도 않았던 이런 물건들에 눈이 돌아가고 혹여나 세일이라도 하는 기간에는 사재기를 하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장을 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쟁여두기 솜씨가 이렇게 발휘되는군요. 전기세, 가스비 등 공공요금에 대한 부담감도 처음으로 느껴봤습니다. 아빠는 종종, “너는 가래떡을 한 똬리를 사서 입에 꽂아줘도 떡이 똑 끊어지면 그마저도 귀찮아서 굶어 죽을 게다!”하고 저의 게으름을 묘사하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식재료들 사는 재미로 처음 몇 달간은 요리도 열심히 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의 통찰력은 궁예의 경지였나 봅니다. 굳이 ‘나 혼자’만을 위해 이 많은 재료들을 사다가 요리를 해야 할까 싶어 이내 간편 요리들이나 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스스로를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엄마가 ‘과일 좀 먹어라. 약 좀 먹어라’했던 잔소리가 들리지 않자 제 깊은 내면 어딘가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사칭하며 저를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건강한 한 끼를 위해 레시피를 찾아가며 채소 요리도 만들어보고, 더블린의 빈약한 햇볕을 보충할 비타민D도 챙겨 먹어보고. 오로지 ‘나’를 위해 부지런해지는 시간들. 나를 스스로 돌볼 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독립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독립생활은 유영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퇴사하기 전, 대리님이 밥을 사주시면서 스물아홉의 유학행을 격려해주셨던 말이 이 순간 감사스럽게, 완연하게 와 닿습니다. 오며 가며 모아 온 소품으로 허술하게 꾸며온 집, 그리고 살짝 헝클어지기도 한 제 방의 모습은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넌 이렇게나 청결치 못하고 가끔은 이런 고물더기를 모아 오는 데 취미가 있는 사람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나'라는 객체에게 '나'라는 주체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 하는 듯합니다.
이제 곧 나의 요새를 처분하고 본가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쉽긴 하지만 그간 몸소 느껴온 엄마의 고생을, 다음 독립 기회까지 최대한 옆에서 덜어드려야겠다는 대찬 포부를 지녀봅니다. 해병대 캠프 때 생고생을 하며 엄마에게 잘하겠다고 눈물로 다짐 한 뒤, 집에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철회하지 않기를, 이번만큼은 '제발'하고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