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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Jul 23. 2018

아빠의 일본어 일기

#별첨. 쓸쓸해하지 마요. 이젠 나와 같이 가요.

 


 유치원에서 가족 자랑을 하라고 하면 저는 늘 똑같은 문장으로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아는 것이 많아요!” 그렇지요. 아빠는 아는 것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동네 도서관에서 다독왕으로 상을 받은 이력, 또 워낙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라 하셔서 다방면으로 잡학을 꿰고 계시지요. 그래서인지 사소한 일에 엄마보다도 잔소리가 심해,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랑 가깝지 못했던 듯합니다. 엄마가 한마디를 하면 이런저런 지식을 다 갖다 붙여가며 열 마디를 하셨던 아빠. 딸들은 보통 애교스럽게 ‘나는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한다던데 저는 그 반대였지요. “나는 아빠 같이 피곤한 남자랑은 결혼 못 해!” 그럼 아빠도 “나도 너같이 게으르고 고집 센 놈은 사절이여. 이 동물아!” 맞불을 놓곤 했습니다.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걸 좋아했던 저와 극 현실주의, 안전제일주의의 아빠는 마치 자석의 양극과도 같았습니다. 특히 10대가 된 이후로 갈등은 더욱 가파르게 질주했고 20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아빠와의 겸상은 ‘내 오늘 당신의 잔소리를 온몸에 끼얹겠소이다.’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피할 수 있는 대로 피했으며 10시만 넘어도 “어디냐 이놈아 지금이 몇 시냐 계집애가 겁도 없이” 하는 말이 듣기 싫어 되도록 전화도 받지 않았던 그때. 그저 답답하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 쿨하지도, 다정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안정적인 삶만을 요구하며 나를 옥죄이는 것일까. 취직만 해봐라! 바로 독립부터 해야지! 이를 갈곤 했지요.

    

 여전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신 아빠는 지금도 일본어 공부에 빠져계십니다. 몇 년 전, 컴퓨터에 저장해둔 과제를 찾느라 이리저리 폴더를 뒤지다 우연히 아빠가 일본어 숙제로 써온 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빠의 평소 일상이 참 담담히 도 적혀있었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회사에 출근합니다. 운전을 해서 갑니다. 일은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합니다. 퇴근을 하면 집에 와 요리를 합니다. 저는 국물과 생선요리를 좋아합니다. 와이프는 일을 하고 늦게 오고 딸들은 보통 집에 없기 때문에 혼자 밥을 먹습니다. 혼자 먹는 밥은 참 맛이 없습니다. 밤 9시에는 제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합니다. 밤 11시에는 잠을 잡니다.’ 이렇게 간단히 나열된 홑문장들이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늦게 들어오면 아빠가 항상 투박하게 묻는 말. “밥은 먹고 다니냐?” 이 말이 오버랩되면서 그 날 모니터 앞에서 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습니다.    

 

 가끔은 정말 할 일이 많아서, 가끔은 그저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울 때, 아빠는 깜깜한 집에 혼자 들어와 불을 하나씩 켜고, 혼자 먹을 저녁을 열심히 준비하고, 혼자 밥을 맛없게 먹고 있었구나. 그 누구도 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인생은 어차피 고독하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며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연마하며 온갖 잘난 척은 다 했던 나인데. 그런 고독감은 나 말고도 우리 아빠에게도 불가피하고 당연한 감정이겠구나 싶었지요. 왜 항상 엄마든 아빠든 한 인간으로서 먼저 바라볼 수가 없는 건지 저도 참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마치 캠프파이어 때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 콧물을 질질 쏟고 ‘집에 가면 달라질 거야!’ 하고는 하루 만에 원상 복귀되는 초딩처럼 평생을 무뚝뚝한 딸의 역할을 했던 제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하였습니다.      


 회사를 퇴사하며 더블린행을 고민했던 그때, 절대 설득이 될 리 없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며, 못 가게 하면 가출을 해서라도 가고야 말겠다고 대찬 결심을 했더랬지요. 장장 4장의 편지를 출근 전 아빠의 손에 쥐어준 저는 다가올 전쟁에 쓸 창과 방패로 완전무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 뒤 울린 전화. 아빠였습니다. “여보세요? 아빤데. 혹시 벌써 사표 냈냐? 아직 안 냈다고? 그래. 일단 집에 와서 얘기하자. 엄마한텐 아빠가 얘기할게.” 의외의 반응. 저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아빠... 편지 끝까지 읽은 거 맞아? 왜냐면 핵심은 뒤에 있거든...” 아빠는 저의 편지를 읽고 또 읽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결정하셨지요. 회사 일이란 건 당연히 힘든 거지만 내가 버텼으니 너도 버텨야 한다고 얘기할 순 없다고.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대로 보내주자고. 엄마에게 그리 말씀하셨다 합니다.      


 엄마가 되면 그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데, 나는 아빠가 될 수는 없기에 평생 아빠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걸까. 그렇담 아빠가 저에게 그리 하셨듯이 저도 한 인간으로서 아빠에게 접근해보려 합니다. 아무리 핏줄이라도 서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나처럼 쓸쓸함에 여러 번 끙끙 앓았을 거란 건 별반 다르지 않기에. 천륜으로 맺어진 그대의 이야기를 그저 말없이 들어주겠다고. 그게 아무리 고루하고 가끔은 지식 자랑을 동반한 잔소리가 될 지라도, 그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는 아빠의 기대를 저 버리고 아빠는 나를 답답하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빠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자에 ♥모양까지 붙이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내며, 가끔은 진심으로 저의 잔소리꾼 아빠가 보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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