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새로웠던 것이 익숙해져 갈 즈음
퇴사 후,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출국일자를 앞두고, 아일랜드에 대한 정보를 나름대로 수집하느라 비정상회담 ‘아일랜드’ 편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침 엄마가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어 “엄마! 이거 보면 내가 어떤 나라에서 살게 되는지 자세하게 보여주니까 엄마도 안심할 수 있을 거야!” 호언장담을 하고는 함께 시청하기 시작했지요. 순천에서 선생님으로 근무 중이라는 멀끔한 아일랜드 청년. “와. 되게 신사처럼 생겼다 그치?” 엄마에게 어떻게든 아일랜드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갖은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청년이 아일랜드의 맥주와 펍 문화에 대한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네스에 대한 자부심과 유구한 펍의 전통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수록 저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연신 엄마의 눈치만 보고 있었지요. 엄마가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아주 물 만나겄다. 가서 술이나 더 처먹겄어.”
사실은 기대하는 바라 뭐라 딱 잘라 아니라 말은 못 하고. 이윽고 나오는 ‘St. Patrick's day’에 대한 설명에 주제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매년 3월 17일마다 돌아오는 아일랜드 최대 규모의 초록빛 축제. '패트릭'이라는 성인이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또, 성인 패트릭에게 청혼을 했던 여성이 있었는데, 패트릭이 이를 거절하고는 미안한 마음에 선물을 주었다는 일화가 구전되어 여성이 남성에게 프러포즈하는 공식적인 날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합니다.(거절하면 선물을 사주는 풍습도) 초록색 모자와 주황색 수염을 달고 초록빛 맥주를 들고 길거리에 모여든 무수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나도 곧 저곳에서 함께 축제를 즐기겠구나 싶어 온몸이 간질간질해졌지요.
2월 말, 더블린에 도착했고 세인트패트릭스데이까지 한 2주 정도 남았을 즈음, 저는 축제 자원봉사에 지원했습니다. 선발됐다는 메일에 뛸 듯이 기뻐했으며 아침 7시 집합에도 한달음에 뛰어갔지요. 저의 임무는 두 세명 정도의 경찰과 함께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퍼레이드 시간은 오후 한 시였는데, 거리가 완전히 통제될 때까지 저희는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습니다. 폭우도 쏟아지는 마당에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자발적으로 신청했나 슬슬 후회감이 밀려오려 할 즈음,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일랜드 국기로 휘감은 사람들, 여러 모양의 초록색 모자를 쓴 가족, 초록색 줄무늬 스타킹을 신은 꼬마들. 그저 길거리 구경만 해도 즐거워집니다. 퍼레이드가 시작되고는 휘향 찬란한 그들의 무대장치와 퍼포먼스에 정신이 팔려 제가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지요.
저녁엔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그때까지 낮잠이나 잘 요량으로 퍼레이드가 끝나자마자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왔더니 홈맘 Peggy가 저녁에는 나가지 말라며 저를 극구 말립니다. 매년 술판으로 시내는 난폭한 외국인들로 가득 차, 정작 아이리쉬들은 세인트패트릭데이면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말과 함께. 얌전히 친구들과 맥주 몇 잔만 마시고 들어오겠다고 Peggy를 안심시킨 후에야 겨우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더블린 시티 센터를 중심으로, Peggy가 말한 그대로 술에 취해 과격한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펍에 들어가 낯선 이들과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일 년에 한 번쯤 이렇게 누구든 반겨주며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있으면 참 좋겠다 하며. 처음 경험하는 이 초록 빛깔의 리피강과 흥겹게 밤을 타고 흘러드는 아이리쉬 음악에 앞으로의 더블린 생활이 즐거울 것이라는 예고편이라 여긴 첫 세인트패트릭데이.
올해 두 번째로 맞이하는 세인트패트릭데이는 아침 10시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했더랬습니다. 퍼레이드 때문에 손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 걸, 퍼레이드 전후로 술을 찾는 이들이 한 무더기. 그러나 아일랜드 정부는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후 2시 이전에는 술을 팔 수 없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손님들의 빗발치는 항의는 전부 우리 탓. 왜 술을 살 수 없냐는 그들의 항변에 일개 외국인 노동자인 저로서는 그들을 100% 만족시킬 수 있는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글쎄요. 제가 안 팔고 싶어서 안 파는 건 아닌데. 저에게 화 좀 그만 내세요...” 그렇게 술로 실랑이를 하다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한파를 만나고는 미련 없이, 축제고 나발이고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헛헛한 마음에 칼칼한 김치찌개나 끓여 하우스메이트들과 나누어 먹고, 그렇게 마지막 세인트패트릭데이는 끝나버렸습니다.
특별했던 것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더블린에서 지낸 지 일 년이 넘어가니, 처음 유럽에 와서 당혹스러웠던 것들 혹은 감탄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아갑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면, 익숙함을 느낄까? 또다시 새로운 어떤 것을 직면한 듯 당황할 때도 있을까? 아마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하겠지. 공항철도를 타면서는 새삼 감탄하겠지. 마치 한국에 처음 가는 여행객처럼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있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