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연필을 깎아주는 마음
아일랜드에 오기 전, 미리미리 짐 좀 싸놓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못 들은 체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벼락치기하듯 짐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전, “다 쌌냐?”라는 엄마의 문자에 아직 끙끙거리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엄마는 집에 가면 다시 같이 챙기자고 하십니다. 역시 방 치우기와 짐 챙기기의 달인인 우리의 엄마들. “속옷은 어디에 넣었어?”, “설사약 왜 빼놨어! 외국 가면 필요하다니까!” 하나씩 하나씩 챙기다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시더니 우시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저도 덩달아 눈물을 똑똑 떨어뜨렸습니다. 한참을 엄마랑 안고 울다가 불현듯 초등학교 때 일요일 밤마다 책가방을 챙기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연필을 썼는데, 매주 일요일 밤마다 엄마는 연필을 아주 정성 들여 깎아주셨습니다. 사각사각. 스걱 스걱. 촘촘촘. 그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누군가 ‘평화롭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연필을 깎는 소리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보신 아빠가 연필 깎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엄마도 일요일에는 힘들다며 자동 연필깎이 기계를 사주셨습니다. 연필을 구멍에 넣자마자 슝 하고 아주 빠르고 날카롭게 깎이는 최신형 기계였지요. 그럼에도 저는 늘 일요일 밤이면 엄마에게 연필을 가져갔고, 엄마도 아무 말 없이 커터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아주셨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엄마와 저만의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이 생겼습니다. 남들 다 있는 언니 오빠나 동생이 없었기에 동생 좀 만들어 달라 노래를 불렀는데 일곱 살이나 어린,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어여쁜 동생이 생긴 것이죠. 정말 추웠던 그 해 겨울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눈보라와 미끄러운 빙판길을 헤쳐 가며 병원에서 처음으로 동생을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나의 혈연. 정말이지 그렇게 예쁜 아기는 평생토록 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와 아기가 퇴원 후 집에 오려면 기간이 많이 남았었는데, 매일매일 일기장에 디데이를 줄여가며 동생이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엄마와 아기가 퇴원 후 집에 왔는데, 이게 웬일! 상상해본 적도 없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집에 오시면 항상 저부터 안아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모든 가족들이 동생 곁에만 모여 있었고 아빠도 엄마도 동생만을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뺏긴 기분. 동생이 너무 예쁜데, 동생이 너무 미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곱 살이나 많은 언니였고, 누구 하나 ‘너는 이제 언니다’ 말한 적은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나 좀 봐달라고 징징거려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던 듯합니다. 때로는 분유를 타 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등 언니로서의 의무마저 잘 수행해낸 저였습니다.
가장 서럽고 속상했던 건, 밤에 잠들 때였습니다. 동생이 오기 전까지 저는 엄마랑 한 방에서 껴안거나 마주 보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생기고 나니 엄마는 늘 동생을 향해 누웠고, 저는 엄마의 등을 보며 잠이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데, 그 여덟 살 짜리는 엄마가 혹시 들을까 최대한 반대편 벽 쪽에 가까이 붙어 숨죽여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나중에야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엄마가 다 아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큰 아이를 어르고 달래면 혹여나 더 혼란스러울까 차마 안아주지 못하셨다고. 엄마도 함께 숨죽여 한참을 울다 잠드셨다는 건 나중에야 안 사실.
그래서 연필을 깎는 일요일 밤은 저와 엄마에겐 암묵적으로 합의된 유일한 둘만의 시간이었습니다. 저에겐 엄마가 오로지 저에게만 집중해주는 시간, 엄마에겐 여전히 너를 같은 크기로 많이 사랑한다고 큰 딸에게 표현해주고 싶었던 시간.
아일랜드로 출발하기 하루 전, 정말 오랜만에 엄마와 동생과 한 방에서 잤습니다. 아마 동생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엄마가 제 쪽으로 몸을 틀어 저를 안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이나 된 딸내미인데 여전히 엄마에겐 아기. 잠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을 때도 네가 물갈이하느라 설사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냐며 굳이 꽉 찬 캐리어를 다시 열어 설사약 한 더미를 꾹꾹 눌러 담아주시는, 우리 딸 일 년이나 안 보고 어떻게 사냐며 펑펑 우시던 엄마. 엄마의 품에 안겨 가만히 눈을 감으니 세상 모든 포근함으로 저를 감싼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를 사랑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스물아홉이나 된 내가 엄마의 품을 이렇게나 그리워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엄마라는 단어. “엄마!”하고 부를 때는 아무렇지 않았으면서, 엄마를 노래하거나 엄마를 글로 적어볼 때면 어찌하여 이리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지. 더블린 한 카페에서 글을 쓰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동양 여자는, 타인의 관점에서 무서울까 처량할까 싶어 얼른 코도 들이마시고 눈물도 훔쳐냅니다.
언젠가 저도 저의 아이의 연필을 정성스럽게 깎아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엄마처럼 연필을 예쁘게 깎을 자신도, 엄마가 저를 사랑하는 만치 똑같은 크기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서지 않는데 말입니다. 아일랜드에 오기 하루 전, 엄마와 나란히 누워 나누었던 이야기들, 느꼈던 모든 감정들. 이번만큼은 잊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나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야’라는 핑계로 엄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곳에서 많은 것들을 주워서 1년 뒤 집으로 돌아가면, 딸을 멀리 보내 휑했을 엄마 마음의 공백을 차지게 채우겠다고, 그리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