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1. 나의 속도

by 송석영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더블린 공항에 내리니 한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오른쪽에 앉아 운전을 합니다. 좌회전을 하시는 기사님의 모션이 너무나 이상해서 왜 굳이 좌석을 오른쪽에 만들었을까 궁금해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예쁘게 생긴 주택에 들어서 띵동 하고 벨을 눌렀습니다. 표정에서부터 ‘너구나. 정말 반갑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라고 말하는 듯한 할머니의 마중이 더블린에서의 첫 인연의 시작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더블린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났는데 이 ‘한 달’이라는 말에 ‘벌써’, 혹은 ‘밖에’라는 수식어 그 어느 것을 붙여도 어색하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래 아일랜드에 한 달 살아보니 어떻던가요? 있을 것 같다던 것들을 찾아내셨나요?’라고 물으신다면... 하하.. 아직은 저의 재료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중입니다. 사실은 ‘찾는다’와는 반대로 버려야 할 것을 인지해버렸습니다. 흔히들 ‘한국은 이래서 안돼.’라며 외국의 여유로운 삶을 부러워하곤 하는데, 아마 이 글은 여러분이 이미 어디선가 본 이야기와 상당히 흡사할 거라 생각합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수능 만점자의 인터뷰만큼이나 진부한 이야기지만 저에겐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기에 짚지 않고서야 넘어갈 수 없어 글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국에서의 저의 기본적인 루틴을 알려드리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귀가 밝은 저는 아이폰 알람이 ‘또ㄷ-’ 시작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고,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아침 일찍부터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루를 시작하는 부류의 인간입니다. 약속 시간은 늘 10분 전 도착,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한 뒤에 계좌 송금도 혹시나 까먹을까 카카오톡 대화창에 메모해두었다 바로 이체하는, 다리도 짧은 주제에 걸음은 빨라 웬만한 남자들과의 보행 경주에서 늘 승리하고, 식사도 10분이면 마무리하고 화장까지 고쳐놓는 아주 스피디한 인간이죠.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홈스테이 이후에 생활할 집과 아르바이트를 구하며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을 갖추고 나서 즐기자!’가 목표였습니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루아스를 타고 혹시나 집이나 일자리 메일 답변이 왔는지 G-mail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루아스에는 더블린 시티 중심으로 향하는 회사원들이나 학생들로 늘 가득 붐빕니다. 제가 내리는 곳은 Charlmont라는 역인데, 역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면 수로를 오른쪽으로 두고 긴 도로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문득 걷고 있다가 무언가를 깨달아버렸습니다. 제가 행인들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들이 저를 제치고 쌩쌩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롱다리 아저씨라 걸음이 엄청나게 빠르시군 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도 제 앞으로 쌩 지나갑니다. 그 뒤로도 수십 명이 저를 지나쳐 걸어갑니다. 마치 크레이지아케이드 같았습니다. 나는 느린 캐피. 다들 배찌라도 되는 모양이야? 흥! 내가 여기서 가장 걸음이 느린 아이라니. 고개를 저으면 그저 저으면 예전처럼 다시 빠른 걸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나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유 있는 유럽인은 개뿔. 왜 이리 빨리 걷는 거야! 그래서 경보 수준으로 학원까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앞지르는 걸 견딜 수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방해가 된다는 느낌은 더 싫었습니다.


그렇게 황새 좇는 뱁새처럼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통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교하던 중, 분명 같은 길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더블린은 워낙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길을 걸어갈 때 비를 맞지 않으려 우산을 몸 가까이 붙인 채 움츠리고 걸어가곤 했는데, 그 날은 햇빛이 처음으로 쨍쨍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도로 옆의 수로가 그렇게 깨끗한지 몰랐습니다. 햇볕에 반사되어 맑게 반짝이는 물 옆에 살랑살랑 흐드러진 버들이라니. ‘나 엄청 예쁜 거리를 매일 지나다니고 있었구나.’ 싶더군요. 왜 몰랐지? 빨리 걸어서?


찰몬트역에서 학원까지 걷는 길


정답은 ‘여전히 타인에게 신경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살기 힘들다고. 외국에서 살고 싶다고들 얘기합니다. 저 역시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리가 길어서인지 저벅저벅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또 조바심을 냅니다. 9시간이나 느려진 이 나라에 발을 딛고 있다 해서 나의 생태 시계가 자동으로 느려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저니까요. 어쩌면 ‘유럽에 왔으니까 이젠 여유롭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옳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 느리게 살 필요도, 더 빠르게 살 필요도 없이 그냥 내 속도로 살면 되는데. 나의 속도. 그래! 그걸 먼저 찾아야겠다 싶은 하루였습니다.


아직은 이 곳에 ‘살고 있다’기 보다는 여행하고 있는 듯 한 기분입니다. 틈틈이 외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해보자며 산책을 종종하고 근교 여행도 미루진 않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신경은 집과 아르바이트에 곤두서 있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일단 기본적인 생존권을 확보해야만 다음 단계를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등교시간에도 숨차지 않게 걷고 있는 중입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그렇게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 대사가 이리도 먼 타지에서도 적용되다니. 성장과정에서 모범생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으나 한 번 따라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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