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다페스트의 밤하늘에 열린 Yellow Hall
2017.8.9~13 헝가리 부다페스트, 발라톤 호수(티하니마을) 여행기
부다페스트 이틀간의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허름해 보이는 거리에 간판도 없어 찾아가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숙소에 들랑날랑 거렸음에도 ‘여기가 어디지?’하며 헤매기를 부지기수. 다시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짐을 풀고 우선 시내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이전에 여행했던 오스트리아, 체코와는 또 다른 분위기.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유럽보다 더 생소하고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아마 딱 떨어지게 정리되지 못한 가게들과 길거리에 반짝이는 전구들로 휘감긴 포장마차들 덕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친숙하게 느껴지면서도 제 3세계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빙을 하는 남직원들은 또 왜 이리 멋있는지. 훤칠한 키와 우람한 어깨에 과연 흉노족의 후예들 답구나 싶었습니다.
시내를 구경한 뒤 어부의 요새로 갔습니다. 날이 저문 뒤라 반짝이는 불빛 아래 마차시 성당을 보는데 그 특유의 모자이크 같은 무늬가 더욱 독특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건물의 외관을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 넋을 놓고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멀찍이 타이타닉의 OST가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멜로디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아서 어부의 요새 안의 연주가에 바짝 다가가 앉아 한참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부의 요새를 비추던 금색 빛깔이 제 엉덩이에 휘감기며 금덩이가 된 건지,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며 겨우겨우 천만금이 된 엉덩이를 떼어 세체니 다리로 아주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 날은 유난히 세체니 다리의 전구보다 달이 더 빛났는데, 주의 깊게 보니 달이 엄청나게 크고 동그랬습니다. 마치 까만 하늘에 노란 구멍이 난 것처럼.
부다페스트의 땅 위를 걷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노랗고 동그란 문을 열어주고 “지금 이리로 오면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듯했던 하늘. 그렇지만 그 밤, 금빛의 부다페스트는 찬란하다는 수식어가 참 알맞을 정도로 눈이 부셔서 아무 데로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걷고 또 걷고. 계속 걸으면서 도나우 강과 건물만을 바라보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제일 행복했던 그 시절로 보내준다고 한들 이 곳에 더 남고 싶다고. 그렇게 낭만적인 순간들을 만끽하고 호스텔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어디선가 뵌 것만 같은 얼굴을 마주하였습니다. 베드 버그. 베드 버그가 제 침대에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악! 너무 당황하여 스마트폰으로 베드 버그를 발견했을 때 후속조치에 대해 검색했습니다. 일단 호스텔 방을 바꾸든가, 호스텔을 바꾸든가 하라는 의견이 대다수. 당장 방 교환을 요청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모락모락 피어올라 침대가 아닌 플라스틱 의자 두 를 붙여 그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야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온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베드 버그에 물린 자국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휴. 다행히 일찍 발견하고 잘 피했나 보다 안심했지요.(하지만 더블린에 돌아간 이후에 베드 버그에 물린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데려온 것 같아 각종 살충제, 울면서 매트리스를 랩으로 싸고 난리 브루스를 쳐 겨우 박멸) 그 날은 부다페스트의 숨겨진 보석 발라톤 호수로 향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부다페스트 델리 기차역에서 허름하고 더러운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싱싱했습니다. 역에 도착해서는 티하니 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특정 역에 내렸어야 했는데 역시나 저는 도착 예정지보다 훨씬 더 가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정차벨을 누르고야 말았습니다. 내려서는 당최 이 곳이 어디인지 구글로 검색하던 중 너무 더운 날씨에 에라 모르겠다 일단 호수를 따라 위로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는 그래도 높은 확률로 저에게 피해보상을 해주는 듯합니다. 아쿠아 물빛의 호수를 따라 걷다 보니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고 있는 곳까지 이르러 그늘에 누워 나름의 피서를 즐겼습니다.
슬슬 배가 고파 다시 지도를 켜고는 티하니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라벤더 향이 물씬 풍기는 보랏빛 마을. 여기에 오니 진짜 여름휴가를 떠나온 느낌이 물씬 들었습니다. 마을을 몇 바퀴씩이나 돌며 라벤더로 만들어진 갖가지 기념품들을 구경하고 전망 좋은 카페로 들어가 라벤더 맥주와 더운 열기에 취해 뭉게구름 같은 상상에 취해있었습니다. 나오는 길에는 비틀비틀 거리기도,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카메라를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그렇게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카메라고 조심하려 단디 준비를 했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야. 더블린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니 돌아가서도 조심하자고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부다페스트의 중심으로 돌아와 바치거리에 펼쳐진 휘향 찬란한 전구들에 휩싸인 식당들을 둘러보았는데 이전의 유럽에서 봤던 노천카페의 느낌보다는 한국의 주황 빛깔 포장마차와 비슷한 느낌이라 더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골목골목 둘러보니 문이 없는 건물 안에 주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천장에 달린 물 선풍기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호스에 작은 구멍을 뚫고 선풍기 바람이 물을 분사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아래 물을 맞으며 맥주와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더 시원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맥주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켠 후 열기가 다 식은 거리로 나가 국회의사당까지 쭉 걸어갔습니다. 흔히 ‘골드’라고 하면 묵직함과 값비싸다는 수식어가 떠올라야 하는데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의 금빛은 가녀린 처녀의 손목에 채워진 얇디얇은 팔찌처럼 섬세하고 은은한 느낌이 감돌았습니다. 정면으로도, 측면으로도, 반대편 측면으로도, 후면으로도. 심지어 대각선으로도 예쁘다는 말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도나우 강 앞의 벤치에 앉아 저 멀리 반대편의 시타델라와 부다왕궁을 바라보며 내일은 저기서 야경을 바라봐야지 다짐하고 선선한 바람을 즐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