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지극히 주관적으로 쓰는 아이리쉬의 특성
제가 아이리쉬를 처음 만났던 건, 이십 대 초반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닐 때였습니다. 회화수업의 선생님이 아이리쉬였는데, 종종 수업이 끝난 후면 수강생들과 다 함께 부평 한 술집으로 맥주를 마시러 가곤 했지요. 그는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고 합니다.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는데, 딱 한 문장은 기가 막히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마누라 바가지 마니 긁어요.” ‘바가지 긁는다’라는 표현을 마누라한테 배웠을 것 같진 않은데. 저희는 다들 깔깔깔 웃었지요. 항상 기분 좋아 보이고 친절했던 그 선생님과의 한 달 덕분이었는지, 아이리쉬에 대한 첫인상은 긍정적이었습니다. 아마 아일랜드를 선택할 때에도 그런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작용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왠지, 사람들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 걸. 막상 더블린에 오니 아이리쉬를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더블린은 외국인 포화상태. 브라질, 폴란드, 한국 사람이 차고 넘쳐 정작 진짜 아이리쉬는 오히려 드물었습니다. 홈맘, 어학원 선생님들, 하우스메이트, 버스 기사님들, SuperValu의 동료들과 손님들, 그리고 건너 건너 친구들이라는 아주 적은 표본집단이지만 아일랜드에서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아이리쉬’의 특성은 이러이러하구나 나름 추정해볼 수 있었지요.
일단 정말 친절합니다. 사실 ‘친절’이라는 단어보다는 ‘Friendly’하다는 게 더 알맞을 듯합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먼저 와서 인사해주고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재능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아이리쉬 본인들은 아이리쉬의 특성 중 하나가 굉장히 'Nosy'하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궁금한 것이 많아 자칫하면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제가 겪은 오지랖은 모두 저를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작년 세인트패트릭데이 때, 아직 길을 잘 몰라 반대방향의 버스를 탔는데 아무래도 옷차림새를 보고 시티센터로 가겠구나 눈치를 채셨는지 기사님이 어디에 가냐고 묻습니다. 그러고는 반대편에서 타야 한다더니 “아니다. 그냥 내가 저기 트램 정류장까지 태워줄게요. 거기서 트램을 타면 한 번에 가니까”하고는 대뜸 출발해버리는 것입니다. 당황해서 버스카드를 찍으려 했더니 NO NO 하며 굳이 손사래 칩니다. 내려줄 때에도 트램을 타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아주 오랫동안 자세히 설명해주고는 좋은 하루 보내라며 그는 떠났습니다.
SuperValu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그들을 본격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화장한 모습(오렌지빛 태닝, 자줏빛깔 섀도우를 자주 사용, 화장이 굉장히 진함)이나 옷을 입은 모습(남자들은 보통 대충 회색 트레이닝복을 자주 입고 다님, 여자들은 주말이면 한 겨울이어도 꽤 얇고 짧은 옷들을 걸침)만 봐도 아이리쉬구나 아니구나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지요. 거센 아이리쉬 악센트를 사용하는 손님들이 뭔가 질문을 하면 저는 아이리쉬 동료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보통 동료들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하여 잡담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지요. 손님과 꽤나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누며 깔깔 한바탕 웃고 헤어지는 모습에 혹시 아는 사람이냐 물었더니 전혀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왕왕왕...) SuperValu에서는 손님들이 €2인 줄 알고 물건을 가져왔는데 막상 스캔해보니 €3.50이라든지, 빵을 사려하는데 종이봉투가 없다든지, 손님으로서 귀찮은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화를 낼 법도 한 그 순간에도 “No Problem”이라며 느긋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나 쿨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저같이 인내심 부족한 한국인에겐 그저 생소합니다.
하루는 아이리쉬 하우스메이트 Ian과 새벽 늦게까지 한국과 아일랜드의 문화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제시된 같은 상황에 한국인은 어떻게 반응해? 아이리쉬는 어떻게 대답해? 하는 꽤나 흥미진진한 대화였지요. 버스에서 곧 죽어도 채워진 좌석 옆에는 앉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희는 공통점을 찾고 신이 났습니다. Ian 말로는 아이리쉬들은 지나친 스킨십도 좋아하지 않아 너무 가깝게 붙어 말하거나 포옹을 많이 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친구들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얘기를 하면 종종 뒷걸음을 친다는 농담도 함께) 역시나 가장 재미있던 주제는 연애. 아이리쉬 남자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꽤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6개월 뒤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 거야?” 이를 갈며 물어본다고. 저는 한국에서는 보통 꽤 강렬한 호감으로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에 '사랑해'라는 말을 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모든 아이리쉬들이 제가 그동안 관찰했던 것이나 Ian이 말하는 대로 일치하지는 않겠지요. 저에게 아이리쉬는 좋은 인상을 지녔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종차별 주의자였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또 개인에 따라 각기 상대적일 것입니다. '저'라는 사람이 더블린에서, 이 시기에 겪은 아이리쉬들을 통틀어 드라마 캐릭터로 표현해보자면, ‘응답하라 1994’에 나오는 ‘쓰레기’가 가까울 것 같습니다. ‘맛’도 ‘멋’도 모르는 쓰레기. 불평 하나 없이 주는 대로 먹고, 보이는 대로 입고. 그래도 늘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품은 배우 ‘정우’의 이미지처럼 말입니다. 쓰고 보니, 반대로 타인이 관찰하는 한국인의 특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 되짚어 보게 됩니다. 좋은 이미지에 먹칠이나 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