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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Aug 10. 2018

엄마의 소포

#30. 그놈의 칫솔 때문에



 어느새 계절은 세 바퀴나 돌아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습니다.(11월쯤 작성) 처음 더블린에 올 때에도 겨울이었지만 그 두꺼운 옷들을 전부 챙겨 올 수는 없어 실용적인 옷가지를 빼고는 한국 집에 놓고 왔었지요. 마침 핸드폰도 고장이 나, 부모님께 겨울 옷가지 등과 친구에게 받은 중고 핸드폰을 좀 부쳐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드디어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소포 도착. 핸드폰이 급해 거칠게 박스 테이프를 뜯는데 웬 칫솔 뭉텅이가 수북이도 쌓여있었습니다. 아 뭐야. 웬 부탁하지도 않은 칫솔을 이렇게 많이. 그리고 상자 밑바닥에는 생리대 스무 통. 큰 손 엄마가 보낸 물품 한가득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큰해지는 코가 느껴지고, 눈물이 또르르 떨어집니다.   

  

 칫솔 이런 거, 여기서도 다 살 수 있는데. 생리대 물론, 우리나라 것이 훨씬 좋긴 하지만 이제 여덟 달 남았는데 스무 통이 웬 말이람. 아일랜드에서 지낸지도 어느덧 9개월 차. 우리 엄마는 아직도 이런 것들이 걱정되는구나. 시험 준비는 잘 되는지, 허송세월을 하는 건 아닌지, 그런 미래지향적인 걱정이 아닌, 아주 기본적인 지금의 생활들이. 한참 울고는, 도저히 이 상태로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어 아주 건조하게 소포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며칠 뒤에야 조금 진정되었다고 생각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뭐야. 무슨 칫솔을 이렇게 많이 보냈어? 여긴 뭐 그런 게 안 팔까 봐?”하고 장난기 어리게 대화를 시작했지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엄마는 아직도 딸내미의 이런 사소한 것들이 걱정되는구나. 그래서 좀 울컥했어.”     


 한참을 말없이 듣고 계시던 엄마는 “엄마가 편지를 한 장 써서 보내려고 했는데 말이야”라는 말로 포문을 엽니다. “그럼 쓰다가 너무 보고 싶어 질 것 같고, 그럼 또 너무 울 것 같아서 에이 하고 펜을 놨어. 처음에 네가 떠나고는 너무 적적하고 너무 슬펐는데,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더라. 엄마랑 아빠가 어릴 때부터 너에게 많이 강압적으로 했던 건, 우리는 네가 편하게 살았으면 해서였는데. 그게 너에겐 견딜 수 없는 길이 었겠구나 이제야 생각이 들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는 사실 걱정이 많았어. 돌아와서 아무데서도 너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아빠가 그러더라. 믿는다고. 걔는 뭐가 됐든 자기 식으로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어보자고. 그래서 엄마는 이제 걱정 안 해. 너무 서두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 잘 생각해서 돌아와. 응?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응?”     


 울먹울먹,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엄마에게 조용히 귀 기울이던 제 뺨에는 이제는 대놓고 눈물이 흐릅니다. 십 대 때부터 유독 부모님과의 갈등의 골은 깊었습니다. 벽창호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지요. 그래도 꾸역꾸역 제 갈 길을 가곤 했지만, 그 천장을 뚫는 과정은 그 무엇보다 험난했습니다. 그랬던 아빠가 저의 더블린 행을 격려해주시고, 이제 엄마는 그간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다고, 저의 모습을 다 이해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제가 그동안 정처 없이 찾고 있던, 저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와 전화를 끊고, 엄마의 말을 곱씹어보니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아주 대차게 마지막 회사의 문을 닫고 나왔지만, 왜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이 시점은 다시금 절망이나 두려움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돌아가면, 눈치 보며 온 가족이 다 마주하는 저녁시간에 도망치는 일은 없겠구나. 안도감과 감사함이 마음의 문을 녹여 더 짙게 스며듭니다. 

    

 더블린에 오면서, 가족과의 물리적 거리는 더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다 같이 먹고 자고 할 때보다 전화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 아빠가 요즘 무엇 때문에 즐거운지,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 더 자세히 알아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늘 같은 공간에 있었기에 우리 가족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우리는 집 바깥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잘 알지 못합니다. 이제는 엄마로, 아빠로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그들을 더 알아가는 노력을 들여보려 합니다. 엄마 아빠에게 숨기는 것 하나 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해보는 것이 평생의 버킷리스트였는데,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드디어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놈의 칫솔 때문에. 올해도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기는 글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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