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와 함께 특유의 정취가 묻어나던, 리스본
2018.5.22~27 포르투갈 포르토, 리스본, 파로 여행기
아침에 일찍은 일어났는데, 쏟아지는 폭우에 오랫동안 조식을 먹고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어제 들렸던 큰 마트에서도 우산은 팔고 있지 않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무작정 거리를 나섰습니다. 이틀 뒤에 Faro에 가는 버스 티켓을 끊으러 레데 버스터미널에 잠깐 들른 후, 알파마 지구로. 아까보다 더욱 퍼붓고 있는 비에 한 걸음 떼기도 무서웠으나 일단 미로 같은 마을길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습니다. 그냥도 약간 무서울 것 같은 경로인데, 비에 어둑어둑한 구름까지 함께 하니 약간의 공포심을 느끼며 계단 위를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올라가 마을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벽돌색 지붕이 비에 젖으니 공포영화를 상기시킬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비를 참을 수가 없어 가까운 기념품 가게를 뒤져 우산을 찾아냈습니다. 내친김에 상 조르제 성까지 보고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입구가 막혀있었습니다. 에이. 하는 수 없지. 어차피 상 조르제 성은 야경 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미련 없이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이번엔 벨렘지구로 향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건물. 바로 벨렘 제로니무스 수도원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어마어마하게 늘어서있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부는 차마 들어갈 수 없겠다 싶었고 수도원의 외관을 한참 들여다보고 벨렘 탑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그리고 드디어 그 유명한 벨렘 에그타르트를 세 개 사서 옆 집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함께 한 입 맛보는 순간,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타르트가 이렇게 바삭바삭하고, 커스타드 부분은 이리도 촉촉할 수 있는 거지? 어찌 이리 인위적인 단 맛이 없을 수가 있는 거지? 요리왕 비룡이라도 된 것처럼 인생의 한 진리를 깨우치는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제의 옷에 풀칠을 할 때 계란 흰 자만 필요하여 쓰지 않는 노른자로 타르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벨렘의 명물 나타(에그타르트)라고 합니다. 평소라면 타르트같은 건 하나만 먹어도 족하는데, 앉은 자리에서 두 개를 흡입해 버렸고, 남은 하나는 내일 먹기 위해 아껴야만 했습니다. 스타벅스에 앉아 보조배터리를 충분히 충전한 후에 호시우 광장으로 향하는 트램을 탔습니다.
라벤더 나무로 둘러싸인 호시우광장에 발을 들이자, 비를 몰고 다니던 구름이 사르륵 걷히고 햇빛이 한줄기씩 떨어집니다. 날씨가 막 개기 시작하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린 하늘이 무척이나 예뻤습니다. 드디어 웹사이트에서나 보던 노란색 28번 트램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따르릉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달리고 있어, 여유롭게 트램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또 그 안에 서있는 사람들도 거리의 풍경을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진을 열심히 찍다가 포르토에서 저녁을 함께 했던 언니에게 연락을 해서 이번엔 리스본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 곳은 돌판에 스테이크를 구워주는 곳. 칼칼한 문어밥 그리고 화이트 샹그리아까지 주문하여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고는 야경을 보러 다시 알파마 지구로 향했습니다. 어디에 서도 예쁜 배경 탓에 서로서로 오순도순 사진을 잔뜩 찍어주기도 했지요. 언덕 위에서 어두워지는 하늘과 하나씩 켜지는 불빛들을 보면서 선선한 바람과 함께 리스본의 정취를 들이켜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드디어 텅 빈 28번 트램을 타고 시내까지 내려왔습니다. 더블린에서 매번 꼬리가 긴, 지하철처럼 생긴 트램만 보다가 이렇게 아담하고 고전적인 형태를 띠는 트램을 타니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실컷 잘 놀고 샤워를 하며 내일은 여기를 가고 저것을 먹고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거울 앞에 선 찰나. 아악!!! 비명을 질렀습니다. 온 몸에 퍼진 붉은 자국들. 이는 필시 내가 아는 이의 소행일지라. 모기라고 믿고 싶었지만 저는 그의 흔적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베드버그였습니다. 작년 부다페스트에 이어 두 번째. 남들은 한 번 물리기도 힘들다는데 왜 나에게 자꾸 이런 일이. 당장 카운터로 달려가 물린 자국을 보여주고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주 태평하게 “올해는 아직 없었는데.”라는 그녀의 말이 화가 돋았지만 꾸역꾸역 짐을 챙겨 바뀐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뀐 방은 훨씬 크고 깨끗했습니다. 진작 이런 방에서 잤더라면 애초에 베드버그에 물릴 일이 없었을텐데. 그래도 이번엔 두 번째라 그런지 앞으로의 계획이 딱딱 서기 시작했지요. ‘더블린 집에 돌아가기 전에만 잘 처리하면 돼!’ 방에는 흑인 남자 한 명이 이미 침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저에게 친절히 인사를 해왔습니다. 어디서 왔고, 이름이 뭐냐고 하기에 “한국에서 온 Song”이라고 대답했더니, 깔깔 웃으며 어떻게 이름이 Song이냐며 아이처럼 좋아합니다. “하하. 너는 어디 사람이니? 그리고 이름은 뭐야?” 그러자 그는 “My name is Destiny and I am from Spain.”이라고 합니다. “장난하니? 네 이름은 Destiny면서 내 이름이 신기하다고 하는 거야?” Destiny와 저는 함께 깔깔깔 웃다가 일단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고작 이틀 째라 이렇게 낯선 리스본에서 단 둘이 방을 쓰게 된 노래와 운명이의 진기한 인연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