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연과 기회의 상관관계
친구와 맥주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를 기다리던 중, 낯선 사람이 말을 걸었습니다. 학생이니 어디서 왔니 등등 대화가 오고 가다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얘기하니 자기 친구 중에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처음엔 이게 웬 개수작인가? 하는 되지도 않는 도끼병이 잠시 돋았으나 뭐 번호 하나 알려준다고 해서 별 일 있겠나 싶어 선뜻 번호를 적어주었습니다. 민망하게도 정확히 다음 날 전화가 왔고 Talbot street에 있는 SuperValu라는 슈퍼마켓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CV를 보낼 이메일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SuperValu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말입니다.(CV를 제출하고 연락 오는 시간이 조금 걸리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한국에서도 알바는 꾸준히 해왔던 터라 알바 면접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말입니다. 인터뷰라고 해봤자 ‘언제부터 일할 수 있니?’, ‘언제까지 일할 수 있니?’이 정도만 영어로 준비해 가면 되겠거니 하고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당당히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입구에 들어서 바로 보이는 경비원에게 면접을 보러 왔다고 얘기했고 한 매니저가 저를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휴게실에서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인사를 건넵니다. 면접 시 동료들에게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들 해서 최대한 밝게 대답을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물어봅니다. “Are you nervous?"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야 했는데... 저는 전혀라고 대답하고 하하 웃었습니다. 영어라 힘들긴 하겠지만 알바 면접에 긴장될 것까지야. 곧 사무실 문이 열렸고 첫인상만큼은 참 좋았던 Andrew와 도도한 Dorota가 저를 반갑게 맞아주고 그렇게 2:1 구조의 입사 면접이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시작으로 갑자기 Dorota가 웬 종이를 보며 저에게 와다다 질문을 던져댑니다. “지원 동기는?”, “너의 강점은 무엇이니?”, “여태까지 이뤘던 최고의 성과는 무엇이지?”, “손님이 무례하게 굴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거니?” 등 장장 20분간의 압박면접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나 당황했지만 저에게는 이래 봬도 수차례의 면접에서 낙방한 한국의 취준생이라는 위대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예전의 면접 기억을 살려 되는대로 말하고 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대답들을 영어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생존 욕구에서 나온 또 다른 자아였을까요?
어려운 면접이었고, 완벽하게 대답하지는 못했겠지만 저는 그 날 SuperValu에서 나오는 순간 좋은 예감을 감지했습니다. 합격이면 다음 주 화요일에 전화를, 불합격이면 이메일을 보내주겠다 합니다. 그렇게 또 저는 여러 가게에 CV를 돌리며 열심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학원에 다녀오자마자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울리는 벨소리. 띠로리. SuperValu였습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Dorota의 목소리. “Hi! How are you? We decided to give you a chance. Congratulations!"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칠흑 같던 구직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이렇게까지 맨바닥에서 시작해서 성공한 적이 처음이라는 생각에(물론 우연이 작용하긴 했지만) 몇 시간째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연애가 아닌 것에 가슴이 설레는 건 참말로 오랜만인지라 내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주체가 존재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학원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니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마침 룸메이트 쏘도 알바를 구하게 되어 저희는 한국 식당에서 치맥으로 자축을 했습니다. 돈 버는 수단말고도 남은 더블린 생활을 더 값지게 써 나갈 수 있는 배움터가 되길 바라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