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르바이트 전쟁
더블린에 오기 전부터 제일 걱정했던 것은 바로 일자리 구하기였습니다. 말 그대로 쥐꼬리지만 꼬박꼬박 모아 온 월급 일부와 퇴직금으로 더블린 생활은 가능했으나 여행자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학생비자 이렇게 두 가지인데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일주일에 40시간, 학생비자는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주들 입장에선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가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지요. 저는 불행히도 학생비자로 이 곳에 왔고, 그렇다고 영어를 특출 나게 잘하지도 않았습니다. 검색창에 ‘아일랜드 학생비자 동양인 여자 일자리 구하기’ 등등 세부적으로 검색했더니 쉽지 않다는 결과물들이 대부분. 그중에 바늘구멍에 새는 빛처럼, 그래도 계속 도전해보니 구해지긴 하더라는 아주 미미한 확률에 저의 삶의 질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더블린에서는 알바를 오프라인으로 구하더군요. 상점 창가마다 'STAFF WANTED! VISIT WITH CV'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온라인 지원이 가능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상점이 그렇습니다. 이 말은 즉슨 가게마다 들러 CV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제출해야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세상에! 21세기에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 하겠지요. 검색창에 찾아보니 CV를 제출할 때도 그냥 건네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고 합니다. 그 블로거는 “안녕? 너희 사람 구하고 있니? 내가 정말 조이풀하고 어메이징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너희 관심 있니? 그게 바로 나란다?”라는 너무나 재기 발랄하여 존경스럽기까지 한 대사와 함께 CV를 돌렸다고 합니다.
한 때는 버스에서 비켜달라고 큰 소리 칠 용기도 없어 목적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내리곤 했던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5월 이후면 아이리쉬 대학생들이 돌아오기 때문에 검은 머리 외국인이 알바 구하기는 불가능이라 하여 4월 안에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게 안에 들어가 할 말을 연습장에 쓰고, 외우고, 거울을 보며 읊어보고, 활짝 웃으며 한 번 더 말해보고, 지겨운 내 인생이여 한탄 한 번 하고, 또다시 대사를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 CV를 30장 정도 출력해서 어딜 가든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구인 글을 써붙인, 괜찮아 보이는 펍을 발견했습니다. 한 30분은 고민한 것 같습니다. 들어가 볼까? 아니 난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나한테 막 질문하면 어떡하지? 심지어 고용되면 비싼 루아스(트램) 타고 다녀야 하나?라는 김칫국도 마셔보고.
오랜 시간을 망설이다 그간 암기한 대사를 한 번 더 연습해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Hello. Are you hiring now?"라고 화알짝 웃으며 묻자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별 말없이 제 손에 있던 CV를 가져가 한 번 훑고 저를 한 번 훑고는 모집이 끝나면 연락을 준다고 합니다. 긴장된 상태에서 힘껏 웃느라 얼굴에 경련까지 일었는데 준비한 것에 비해 허탈한 반응이었습니다. 적어도 어디 사는지,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지 정도는 물어봐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역시 처음이 어렵다고, CV를 한 번 내고 나니 이제 가게에 들어가서 CV를 내는 것까지는 떨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냉랭한 반응에 왠지 내 CV를 읽어봐 줄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순 없었습니다. 이쯤 되니 그 블로거의 판타지 같은 대사들이 정말이지 현실적인 거였구나 싶어 조금 더 오버 리액션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구직 이주 차.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줬던 얼굴도 희미해진 연상의 남자가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딱히 활발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의 저는 엄청나게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새 학기에 친구 사귀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고 발표는 수행평가 점수 때문에 덜덜 떨리는 팔을 억지로 빳빳이 들고 최소 점수만 채웠던. 선생님이 “오늘이 며칠이지? 3일이구나. 3번, 13번, 23번, 33번 앞에 나와서 문제 좀 풀어보자.”라고 하면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고 떨리는 손에 쥔 분필로 삐뚤빼뚤 수학공식을 그렸던 그런 아이. 그러다 11살이 되던 해, 여름캠프를 가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광란의 댄스타임을 경험하게 되었지요. 조별로 동그랗게 앉아 순서대로 한 명씩 일어나 춤을 춰야 하고, 잘 추는 조에게 점수를 준다는데, 제 앞의 아이들이 한 명씩 춤을 출 때마다 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습니다.
결국 제 차례가 왔고 저는 그 자리에 그저 엉거주춤 서있었습니다. 다들 저를 쳐다보며 영혼 없는 박수를 치고, 어떤 이는 한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하. 지금이었다면 소주라도 반 병 원샷한 채 접신한 듯 온몸을 흔들어재낄 수도 있었을 텐데. 머릿속은 하얘지고, 울고 싶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때! 그가 나타났습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제 앞 차례라 이미 춤을 한 번 춘 그가 미친 듯이 다시 춤을 추며 동그랗게 모인 아이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저 대신 춰주고 제 옆에 앉은 연상의 그는 저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 못 해. 걱정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하면 돼!”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은 제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남자에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가슴 설레고 멋있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내가 나서야만 하는 순간이 있거나 도로 한 복판에서 창피한 일이 생길 때면 그 말을 한 번 곱씹고 얼굴에 철판을 예쁘게 깔곤 했습니다. 그의 말을 제 지금 상황에 인용해보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난 여기서 외국인인데, 내 얼굴을 얼마나 오래 기억하겠어? 하며. 마음먹는다고 처음부터 활발 활발 열매를 먹은 듯 자기 PR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마디라도 더 붙이거나 제발 좀 CV를 봐달라고 구질구질 매달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그 오빠의 말은 틀린 셈입니다. 그렇게 요란한 몸부림을 거리낌 없이 보여줬던 그 오빠를 저는 18년 동안이나 기억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행동 개시하고 바로 일을 구하게 되진 않았지만, 그 오빠를 오랜만에 떠올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 그는 서른이 되었을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